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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알람브라궁전 알카사바 지하동굴(1)

by leo


아주 먼 옛날, 그라나다에 세상 모든 일을 즐겁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로페 산체스라는 가난한 정원사가 있었다. 그는 매일 부자들의 집을 찾아가 정원을 가꿔주고 받은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가난하면서도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정원에서 나뭇가지 치기를 하면서도 늘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쉬는 시간에는 정원 한쪽 구석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정원 일을 마치면 폐허가 된 알람브라궁전에 올라가 하릴없이 궁전 주변을 배회하는 퇴역군인이나 저녁에 바람을 쐬러 온 동네 사람들에게 차분한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산체스는 가난한 집안형편에도 늘 즐겁게 세상을 사는 남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내와 세상 누구와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열두 살짜리 어린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딸의 이름은 아빠 이름과 비슷한 산치카였다. 딸도 아빠처럼 노래를 좋아하고 춤추기를 즐기는 발랄하고 경쾌한 소녀였다. 아빠가 저녁에 알람브라궁전으로 올라갈 때면 따라가곤 했다. 아빠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면 곁에 앉아 박수를 치며 즐겁게 듣거나, 리듬에 맞춰 춤을 춰 곁에 있던 어르신들이나 아주머니들을 기쁘게 해 드리곤 했다.


어느 해 무더운 여름 성 요한 축일 전날 밤이었다. 그라나다의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들은 모두 알람브라궁전의 헤네랄리페정원에 모여 앉아 더위를 식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밝은 달이 알람브라궁전을 환하게 비췄다. 깊은 숲속에 웅크린 산토끼들의 얼굴에 길게 달린 수염까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헤네랄리페정원 뒷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모닥불을 피웠다. 무더운 여름날 밤 모닥불 피우기는 과거 이슬람이 그라나다를 지배할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었다. 헤네랄리페 정원뿐만이 아니었다. 그라나다의 여러 산 곳곳에서 동시에 모닥불이 밝혀졌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치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봉수를 올리는 게 아니냐고 오해할 정도였다.


헤네랄리페정원 뒷산에 모인 사람들은 산체스의 기타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무더위를 잊었다. 산치카는 친구들과 함께 정원 근처 알카사바성에서 달빛에 예쁘게 반사되는 자갈이나 돌 조각 따위를 주웠다.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친구들이 모두 모닥불로 돌아간 사실도 모른 채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산치카는 알카사바 성벽 아래 깊숙한 구멍에서 아주 정교하게 손 모양으로 조각된 흑요석을 하나 발견했다. 손가락들이 겹쳐졌고, 엄지손가락은 맨 위에 올라간모양이었다. 예쁜 돌을 주운 게 너무 기뻤던 산치카는 곧바로 엄마에게 달려가 신나는 목소리로 자랑했다. 마침 곁에 있던 한 노인이 흑요석을 보더니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옛날 할아버지에게서 ‘손가락이 겹쳐진 흑요석에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들었어. 당장 갖다 버리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가족에게 불행이 닥칠지도 몰라.”


갑자기 터져 나온 큰소리를 듣고 인근에 있던 한 늙은 퇴역군인이 산치카에게 다가왔다. 그는 흑요석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밝은 표정으로 산치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아프리카에서 참전했을 때 똑같은 흑요석을 본 적이 있단다. 다들 이 돌에는 ‘악마의 눈’에 맞서는 온갖 효험이 깃들어 있다고 하더구나. 그들의 말이 맞는다면 이 돌은 네게 불운이 아니라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행운을 가져다 줄 거야.”


늙은 퇴역군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치카의 엄마는 흑요석을 작은 리본으로 묶어 딸의 목에 매달아주었다.


헤네랄리페정원 뒷산에 모인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그들이 할아버지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온갖 전설을 서로 이야기해주고 듣느라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일 따위는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산치카는 숨을 숙인 채 가끔 침을 꼴깍 삼켜가면서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신나는 이야기였다.


산치카는 이야기를 듣던 도중 갑자기 흑요석을 발견한 구멍이 생각났다. 구멍이 제법 커서 자기 같은 어린이 하나 정도는 충분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놀라운 마법의 세계가 펼쳐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길로 산치카는 엄마, 아빠 몰래 축제장을 빠져나가 다시 알카사바 성으로 달려갔다.


산치카는 한참이나 알카사바 성 주변을 헤매고 다녔다. 분명히 흑요석을 발견했던 곳이라고 생각했던 장소에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하게 여기면서 성 이곳저곳을 계속 둘러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산치카는 처음에 구멍이 있던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과는 반대되는 곳에서 신기한 구멍을 발견했다. 그는 서둘러 머리를 안으로 집어넣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얼마나 구멍이 깊은지 끝은 보이지 않고, 오직 칠흑 같은 어둠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갑자기 무섭다는 느낌이 든 산치카는 급하게 머리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이대로 돌아갈까, 혹시 잘못되면 엄마, 아빠를 다시 못 보는 게 아닐까 라며 고민하는 산치카는 그런 걱정보다 더 크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그는 구멍 안으로 주먹만 한 돌 하나를 던져 넣었다. 구멍이 얼마나 깊은지 한참이나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열 손가락으로 네댓 번 계산했을 무렵에야 마침내 “팅” 하면서 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풍덩” 하며 돌이 물에 빠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때 “누가 돌을 던졌지”라는 것 같은 희미한 소리가 구멍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란 산치카는 그대로 뒷걸음질 쳐 엄마, 아빠와 마을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는 모닥불로 도망쳤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닥불은 이미 꺼져버렸다. 그라나다 산 곳곳을 밝혔던 다른 지역의 모닥불들도 모두 꺼졌다. 산치카는 엄마, 아빠를 소리 높여 불러보았다. 친구들의 이름도 불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오래 전에 산에서 내려간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감쪽같이 한꺼번에 산에서 내려간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산치카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힘이 빠진 채 걷던 그는 알카사바 성의 감시탑 아래 돌 벤치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감시탑에 달린 종이 댕댕 하며 울었다. 벌써 자정이 된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겁이 나기도 해서 가슴이 두근두근하던 산치카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개울에서 물이 흘러가는 소리 같았다.


‘여기 주변에는 개울이라고는 없는데.’


무서움에 떨던 산치카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 몰려든 피로 때문에 몹시 졸렸다. 깊은 잠에 막 빠져들려고 하는 희미한 눈 사이로 반짝반짝 빛나는 물체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는 누운 채 눈을 살며시 떴다.


다양한 장식을 치렁치렁 매단 이슬람 군인 수천 명이 대열을 이어 걸어갔다. 어떤 병사들은 손에 창과 방패를 들었고, 다른 병사들은 도끼나 활을 들었다. 병사들의 행렬 중간쯤에는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성이 온갖 보석으로 온 몸을 치장한 채 조랑말 등에 앉았다.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은 이슬람 왕이 마차에 앉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도 온 몸에 다이아몬드는 물론 이름도 알 수 없는 다양한 보석을 둘렀다.


이슬람 병사들의 행렬이 지나가자 산치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따라갔다. 이제 그의 얼굴은 물론 가슴에서도 두려움, 무서움, 공포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은 호기심과 궁금증뿐이었다. 행렬은 알람브라궁전 입구 ‘정의의 문’을 지나 알카사바 성으로 향했다. 망루에서는 늙은 보초 몇 명이 꾸벅꾸벅 졸았다. 산치카는 뒤를 따르다 망루 아래 깊은 구멍을 보았다. 아까 보았던 구멍과 비슷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구멍에는 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는 병사들을 따르는 대신 그곳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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