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사바 성벽 아래 구멍의 입구 부분은 좁고 어두웠지만, 조금 더 들어가자 계단 곳곳에 횃불이 세워져 있어 환하게 밝아졌다. 조심조심 주변을 살펴가며 계단을 하나씩 내려간 산치카의 발 앞에 넓은 홀이 나타났다. 이슬람식으로 꾸며졌고, 은과 크리스탈 램프가 곳곳에서 불을 밝히는 홀이었다. 무더운 바깥 날씨와는 달리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한쪽 모퉁이의 화려한 의자에는 이슬람 복장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손에는 긴 지팡이를 하나 들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긴 수염은 땅바닥에 길게 흘러내렸다. 노인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옆에는 어린 소녀인 산치카가 봐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 앉아 있었다. 방금 조랑말을 타고 지나간 여성도 아름다웠지만, 동굴에 있는 여성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은 스페인 복장이었다. 드레스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돼 빛났고, 머리에는 진주와 은으로 세공해 만든 장신구가 얹혔다.
산치카는 문득 방금 전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옛날 한 이슬람 도사가 왕을 속여 아름다운 기독교 여성을 빼앗은 뒤 땅 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오늘이 성 요한 축일 전날이니?”
절반은 놀랍고, 절반은 겁먹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산치카의 등 뒤에서 갑자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산치카가 뒤를 돌아보니 이슬람 노인 곁에 앉은 여성이 눈을 떴다. 산치카는 너무 무서워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네, 맞아요.”
“그렇다면 오늘은 내게 걸린 마법의 힘이 잠시 멈추는 날이구나. 내게 가까이 오도록 해라. 무서워할 필요는 없단다. 나도 너처럼 기독교도니까. 네가 목에 건 부적을 내 이마에 대 줄 수 있겠니? 그러면 나는 오늘밤만은 자유로울 수 있단다.”
산치카는 부적을 목에서 벗겨내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마법의 여성은 아아, 하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몸을 감싼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허리에 감긴던 황금 전대를 풀어냈다. 그리고 발을 땅바닥에 묶어놓았던 황금 사슬도 벗겨낸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슬이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쿵, 하는 소리를 냈다. 그때 깊이 잠들어 있던 이슬람 노인이 끙, 하는 소리를 내더니 눈을 뜨려고 했다. 그녀는 서둘러 주문을 외면서 손가락을 노인의 눈에 가져다 댔다. 노인은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자, 이제 그 부적을 노인이 손에 든 지팡이에 붙여 보렴.”
산치카는 이번에도 마법의 여성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노인은 손에서 지팡이를 떨어뜨린 채 쿨쿨거리며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저 마법사는 내일 아침까지 잠에서 깨지 않을 거야. 이제 나랑 함께 밖으로 나가자꾸나. 옛날 아름다웠던 알람브라 궁전의 참모습을 보여주도록 할게.”
산치카는 여성의 손을 잡고 홀을 지나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갔다. 두 사람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 망루 아래에 있는 구멍을 통해 나가 정의의 문을 지난 뒤 알카사바 성 한가운데 있는 정원으로 갔다. 그곳에는 아까 보았던 이슬람 병사들이 바닥에 앉거나 말 등에 탄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지만, 그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알카사바 성 정원은 마치 죽음으로 가득 찬 듯 조용했다. 그런데도 산치카는 무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왠지 재미있고 신난다는 느낌만 가득했다.
산치카는 여성의 손을 잡고 알 나스리 궁전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히 낮까지만 해도 다 부서져 폐허뿐인 궁전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정말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었다.
정밀하게 새겨진 궁전 각 문의 장식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눈부셨다. 벽에는 옛 이슬람제국의 수도였던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장인들이 정성 들여 짜 만든 비단 실크가 걸렸고, 바닥에는 페르시아에서 제작한 카펫이 깔렸다. 어떤 벽에는 아라베스크 스타일의 그림들이 걸렸다. 궁전 곳곳에는 누가 밝혀놓은 것인지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궁전 홀에는 팔걸이, 등받이가 없는 긴 의자가 있었다. 산치카가 가끔 동네 할아버지들의 집에 걸려 있는 옛 그림에서 보던 그런 의자였다. 그녀가 본 그림에서는 이슬람 왕들이 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누워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진주 같은 값진 보석이 곳곳에 박힌 가구도 곳곳에 세워졌다. 안에는 물건을 놓고, 윗부분은 의자로 쓰는 그런 가구였다.
부엌에서는 요리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은접시를 닦으며 정리하고, 닭과 자고새 고기도 요리하느라 다들 분주했다. 하인들은 각종 진미가 담긴 은접시를을 들고 부엌과 식탁을 오갔다. 사자의 정원에는 경비병들과 시중들이 북적거렸다.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 없이 조용했고, 심지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도 발자국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산치카는 여성의 뒤를 따라갔다. 궁전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걸은 끝에 코마레스 탑 아래 벽 앞에 섰다. 벽 양쪽에는 석고로 만든 요정 동상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두 요정의 눈은 벽의 같은 지점을 쳐다보았다. 여성은 두 동상을 쓰다듬다가 뒤로 돌아서 산치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단다. 내가 마법에서 풀리도록 도와준 너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지. 옛날 이슬람 왕이 이 벽에 엄청난 보물을 숨겨 뒀어. 내일 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두 동상이 동시에 쳐다보는 벽 부분을 잘 살펴 두들겨 보도록 해라. 그러면 너희 가족은 그라나다에서 최고의 부자가 될 거야. 단 명심할 게 있단다. 반드시 네가 주운 흑요석을 가지고 와야 한다. 그게 없으면 소용이 없어. 그리고 부자가 된 뒤에 재산의 일부를 털어 성당에서 수시로 미사를 열도록 해라. 내가 마법에서 풀리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도록 하렴.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란다.”
밝은 달은 아라야네스 정원의 연못에 방금 떨어진 흰 꽃잎처럼 두둥실 떠다녔다. 오렌지나무와 귤나무 가지는 물론 열매에도 달빛이 수줍게 내려 앉았다. 마법의 여성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도금양 화관을 산치카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이제 산책 시간이 끝나가는구나. 나는 다시 마법의 홀로 돌아가야 해. 이제부터는 나를 따라오지 말거라. 내가 한 말을 잘 기억해야 한다. 특히, 내가 부탁한 미사와 기도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마법의 여성은 산치카의 머리에 짧게 입맞춤한 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후 그녀의 모습은 산치카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쿵 하며 문 닫히는 소리가 퍼지더니 곧이어 저 멀리 다로 계곡 쪽에서 닭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희미한 여명이 동쪽의 산들 사이로 비치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던 궁전은 순식간에 다시 원래의 모습, 즉 폐허 상태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일하던 많은 시중, 경비병 들은 일시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궁전 바닥에서 약한 바람이 잠시 일더니 사그라들었다. 복도와 회랑 사이에는 마른 잎들이 사락거리며 날렸다.
산치카는 꿈을 꿨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서 있는 곳은 분명히 아라야네스 정원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내려왔던 계단을 따라 올라가 집으로 달려갔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녀의 집은 너무 가난해서 문에 걸쇠를 설치할 돈도 없었다. 갑자기 피로가 산더미처럼 밀려온 산치카는 씻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로 달려가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산치카는 아버지 산체스에게 조르르 달려갔다. 그에게 지난 밤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산체스는 딸의 말을 끝까지 듣고는 껄껄 하고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을 꾼 모양이구나.”
화가 난 산치카는 침대로 달려가 도금양 화관을 가져와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산체스는 깜짝 놀라며 화관을 집어 들었다. 도금양 화관은 순금으로 장식됐고, 곳곳에 반짝반짝 빛나는 에메랄드가 박혔다. 그는 도금양 화관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산체스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딸의 손을 잡고 아라야네스 정원으로 달려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아라야네스 정원에도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산체스는 두 요정의 동상 바로 앞에 섰다. 동상들은 정말 무엇인가를 아는 것처럼 벽의 특정 위치를 쳐다보았다. 그는 벽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고는 다시 내려왔다. 잠시 후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말 보물이 있다면 나중에 저녁에 다시 와서 몰래 챙겨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산체스는 집에 돌아와 부잣집에 정원 일을 하러 가지 않았다. 아내는 도대체 이 사람이 왜 이러는 것이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물 생각에 마음이 들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잘 가던 시간이 이날은 왜 그렇게 느리게 흐르는 것인지, 하는 생각만 들었다. 해는 마침내 서산 너머로 기울었다. 그래도 산체스는 기다렸다. 자정이 지나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무렵 산에 올라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저녁이 상당히 깊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산체스는 산치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사람들이 눈치 챌까 봐 호롱불이나 횃불은 밝히지 않았다. 아라야네스 정원에 가서 밝힐 심산이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 길을 힘겹게 걸어 아라야네스 정원에 도착했다. 그는 천장을 쳐다보는 두 요정 동상 사이의 벽을 쿵쿵 두들겼다. 그랬더니 갑자기 벽이 쩍, 하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안에 조그마한 공간이 숨은 게 보였다. 그는 그제야 횃불을 밝혀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항아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혼자서 꺼내보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그는 어린 딸의 힘까지 빌어 겨우 항아리를 벽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산체스는 항아리 뚜껑을 연 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비춰 보다가 하마터면 뒤로 벌렁 나자빠질 뻔했다. 항아리에는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보물이 가득했다. 황금은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었다. 온갖 귀금속으로 장식된 돌판,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보석도 넘쳐났다. 산체스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딸 산치카의 입을 커다란 손으로 틀어막으며 손가락으로 쉿, 하는 표시를 했다.
산체스는 정원 일을 할 때 사용하는 손수레를 집에서 가져와 보물을 실어 날랐다. 집 안에는 놔둘 곳이 없어 작은 다락에 빽빽하게 쌓았다. 그래도 보물이 넘쳐나 할 수 없이 방 한쪽 구석에 작은 항아리를 가져다놓고 보물을 담아 놓았다.
산체스는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인근 교회를 돌아다니며 엄청난 금액을 기부했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먼 옛날 이슬람 도사에 끌려간 기독교 여성을 위해 기도를 해 준다면 나중에 다시 더 많은 금액을 바치겠노라고 신부들에게 다짐했다.
모든 교회에 헌금을 바친 산체스는 어느 날 가족과 함께 그라나다에서 모습을 감췄다. 아무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가난한 정원사 가족이 무엇 때문에, 어느 도시로 이사했는지 누구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다만 여러 해가 흐른 뒤 한 퇴직군인이 그들을 봤다는 이야기를 동네사람들에게 전한 게 전부였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며칠 전 말라가에 갔다가 많은 마차들이 지나가는 장면을 봤어. 그들을 구경하다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어. 그때 마차에서 누가 내려서 내 손을 잡아주더군. 그게 누군지 아나? 바로 로페 산체스였어. 딸 산치카가 말라가의 지체 높은 집안 자제와 결혼식을 올린다며 간다고 하더군.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됐지? 그들이 과연 진짜 산체스 가족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