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은 없다, 다시 태초마을로

40대 아재의 일본어 도전 Step3

by 김영훈 Andrew

한 단계 올라간다는 것

8월 말, 저는 1단계를 마치고 2단계 수업으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한 단계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진도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단계의 첫 수업에서,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방식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9월은, 그 낯설고 벅찬 전환점에서 시작됐습니다.


충격: ‘백지가 되는 경험’

2단계 수업은 1단계와는 분위기부터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바뀌었다는 점이 가장 컸습니다. 1단계가 비교적 가볍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기초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다면, 2단계는 마치 입시 수업처럼 본격적인 학습의 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습, 복습은 기본이고, 단어 암기나 문법 정리와 같은 보조 학습 없이는 수업을 따라가기조차 어려웠습니다. 특히 문법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차이가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1단계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법을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었지만, 복습이 충분하지 않았던 저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제대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어로 문장을 들으면 곧바로 일본어로 대답해야 했지만, 막상 질문을 받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예전에 방송에서 유재석 씨가 “생각이 안 나서 멘트를 못 잇고, 그걸 회복하지 못해 9년 동안 무명 생활을 했다”라고 이야기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출처: 핑계고 유튜브

그때는 단순히 ‘방송이 얼마나 긴장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9월의 저는 그 말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알고 있던 단어와 문법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바로 그 ‘백지상태’를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아,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구나.’


핑계와 현실 사이에서

수업이 점점 두렵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매 수업마다 나오는 숙제는 성실히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습니다.

숙제 피드백도 반영하지 못한 나...

수업 전 복습이나 단어 암기, 문법 정리와 같은 보조 학습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출퇴근만 왕복 3시간, 회사에서는 종종 야근, 주말에는 결혼 후 가족과 보내야 하는 최소한의 시간까지. 물리적으로 공부에 집중할 여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다 보니, 어느 순간 ‘시간이 없어서’라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붙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결국 ‘핑계’였습니다. 점심시간이나 출퇴근 시간 일부만이라도 쪼개 썼다면, 완벽하진 않아도 조금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만큼 일본어 공부가 제 삶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이 시기가 제게 ‘간절함이 부족했다’는 것을 가장 뼈저리게 깨닫게 해 준 시간입니다.


적당히 원하면 핑계를 찾고 간절히 원하면 방법을 찾는다.

하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딱 하나였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듀오링고(Duolingo)를 켰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루틴

단 몇 분이라도 일본어와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지 않았다는 점이 작은 버팀목이 됐습니다. 그 습관 하나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저를 학습의 트랙 위에 간신히 붙잡아 두고 있었습니다.


냉정한 자기 객관화와 선택

9월의 8회 차 수업이 끝난 뒤, 레벨 테스트가 있었습니다. 사실 결과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테스트를 보기 전부터 스스로 이미 ‘이번엔 재수강을 해야겠구나’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고민은 그다음부터였습니다. 단순히 2단계를 다시 들을 것인지, 아니면 아예 1단계로 내려갈 것인지. 1단계 선생님은 예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1단계를 확실히 다져야 2단계부터가 수월해요.

그때는 그냥 지나쳤지만, 실제로 2단계에 올라와 보니 그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게 됐습니다. 1단계 때 배운 문법과 단어들이 제 안에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2단계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테스트가 끝난 직후, 저는 바로 재수강 신청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2단계를 그대로 다시 들으면서 요일만 월수금에서 화목금으로 바꾸는 쪽으로 결정했지만, 곧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금의 내 환경을 고려했을 때, 2단계를 다시 들어도 과연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시 1단계로 돌아가자. 지금의 제게 필요한 것은 무리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기초를 단단히 쌓는 일이었습니다. 이 선택은 일정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1단계는 월수금 수업이라, 제가 화목 새벽에 다니던 수영 시간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수영은 일주일 최소 운동량으로 저와의 약속이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지만, 2단계 재수강을 한다면 결국 일정 조정이 불가피했습니다. 물론, 더 강하게 밀어붙여 2단계를 재수강하는 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때로는 물러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제 상황에 맞는 현실적 선택을 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나아가기 위해 태초마을로 돌아가다.

10월부터 저는 다시 1단계 수업으로 돌아왔습니다. Notion에 문법을 정리하고, 단어를 하나씩 외우며, 수업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환경에서 기초부터 다시 다질 예정입니다.

첫번째도 암기 두번째도 암기 세번째도 암기

추석 연휴와 10월 한 달은 1단계와 2단계에서 배웠던 내용을 정리하며 자율 학습을 병행하는 ‘복원’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11월에 2단계에 다시 도전할 계획입니다. 이 선택은 단순한 후퇴가 아닙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에 가깝습니다. 단기간에 일본어를 끝내려는 목표가 아니기에, 지금의 이 한 발 물러섬이 결국은 장기적인 성장의 발판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 여정은 누가 대신 걸어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오롯이 제가 견뎌내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달 이렇게 회고를 남깁니다. 흔들릴 때마다 방향을 다시 점검하고, 스스로의 위치를 냉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에 요행과 지름길은 없다.

결국 가장 확실한 길은, 기초부터 다시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입니다. 포켓몬스터의 주인공이 태초마을로 돌아가 다시 모험을 시작하듯, 저 역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단단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출처: 포켓몬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