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

40대 아재의 일본어 도전 Step4

by 김영훈 Andrew

의지가 아닌 환경을 바꾼다.


9월 말, 저는 2단계에서 1단계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1단계를 다시 들으면서 기초를 단단히 다지고, 부족한 단어를 채우고, 여유 있게 자율학습을 병행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0월은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재정비의 시간'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10월을 마무리하는 지금, 저는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10월 초, 1단계 수업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이미 한 번 배운 내용이었기에 수업은 익숙했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에도 다른 수강생들보다 빠르게 대답할 수 있었고, 문법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리마인드 차원에서는 분명 도움이 됐지만, 솔직히 말하면 새롭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익숙함'이 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세웠던 계획은 명확했습니다. 1단계 수업은 부담 없이 듣고, 그 여유를 활용해 자율학습에 집중하자. 특히 부족한 단어를 많이 외우자. 추석 연휴도 있으니 집중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추석에는 결혼 후 처음 맞는 명절이었기에 양가 부모님을 뵙는 시간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소 아내가 토요일에 일하고 일요일만 쉬기 때문에, 연휴 때만큼은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사항들을 고려하여 스케줄을 짜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루 2시간 정도는 공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잘해야 1시간, 아니면 듀오링고를 잠깐 하는 정도였습니다.


추석이 지나고 회사에 출근하니 야근의 연속이었습니다. 늦을 때는 밤 10시까지 일했고, 집까지 가는 거리가 있어 도착하면 자정이 다 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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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짧게라도 대화를 나누고 씻으면 12시. 그리고 다음 날 새벽 5시 30분에는 늦어도 일어나야 했습니다. 이런 스케줄이 반복되니 체력적으로 한계가 왔습니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새벽 수영을 가곤 했는데, 야근이 많아지면서 수영은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일본어 수업이 있는 월수금만큼은 꼭 갔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10월 중순, 온수매트를 설치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침대는 점점 더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이 됐습니다. 알람을 4개, 5개씩 설정해도 결국 다 끄고 늦게까지 누워 있는 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저는 지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작 30분이었지만, 그 안에 제 안일함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오늘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오늘만'이 반복됐습니다. 1단계는 이미 배운 내용이니까,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안일함이 스며들었습니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은 어떻게든 지각하지 않으려 애썼는데, 10월의 저는 30분 지각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나라는 사람도 문제가 있구나.

부끄럽다기보다는 한심했습니다. 10월에 나름의 계획을 세웠고, 실행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안다고 어느새 안일하게 대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반성하게 됐습니다. 얼마 전, 유튜브(조승연의 탐구생활) 에서 인상 깊은 영상을 봤습니다.


어떤 액티비티를 하든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중급으로 가는 사람은 10%밖에 되지 않는다. 중급까지만 버티면 상위 10%다. 내가 옆에 있는 사람보다 뭔가를 잘한다는 레벨이 되면 호응이 와서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무조건 중급까지는 버텨야 한다.


10월의 저는 딱 그 상황이었습니다. 1단계를 재수강하면서 다른 수강생들보다 확실히 잘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1단계를 들었을 때, 저는 선생님의 질문에 얼어붙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유난히 대답을 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10월의 저는 그 친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확실히 처음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다른 사람보다 잘한다는 확신이 들어서인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하지만 바로 그 자신감이 독이 됐습니다. 여유가 생기니 나태해졌고, 자율이 주어지니 의지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인정해야 했습니다.


정말 간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8월에 유럽 여행 중에도 비행기 안에서, 기차 안에서, 호텔 침대에서 단어를 외웠습니다. 그때는 정말 간절했습니다. 레벨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재수강만은 피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0월의 저에게는 그런 절박함이 없었습니다. '여유롭게 자율학습을 하자'는 계획은 결국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는 핑계가 됐습니다. 자율이 주어지는 순간, 저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좌절했냐고요? 아니, 오히려 명확해졌습니다. 이번 한 달은 실패가 아니라 저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의지로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강제성이 없어지는 순간 이렇게 의지가 약해지고 실행을 못하게 된다는 걸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명확했습니다.


나를 믿지 말고, 환경을 바꿔야 했습니다.


10월 말, 저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11월부터는 저녁반(18:30)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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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반이 아닌 저녁반으로 바꾼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첫째, 겨울이 다가오면서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온수매트의 따뜻함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고, 잠이 덜 깬 상태로 수업을 듣는 것은 집중력이 좋지 못했습니다. 계속 잠이 쏟아지니 수업 내용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둘째, 새벽반보다 저녁반의 장단점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녁반의 장점은 수업 집중력이 올라갈 것이고, 단점은 업무를 중간에 끊고 가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새벽만 고집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셋째, 선생님을 바꿔보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선생님마다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저녁반 선생님은 어떤지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결정했습니다. 월수금 새벽에는 회사에 일찍 출근해서 최소 1시간씩 일본어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새벽에 집에서 공부하면 아내가 아직 자고 있는데 아무리 조용히 한다고 해도 방해가 될 게 뻔했습니다. 차라리 회사에 일찍 나와서 공부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은 강북이고 회사는 강남인데, 오히려 새벽 일찍 차를 타고 나오는 게 더 편한 것도 있었습니다. 보통 5시 30분에 일어나서 6시에 집에서 출발하면 7시 좀 넘어서 회사에 도착합니다. 간단히 준비하고 공부하면 7시 30분부터 9시 전까지는 공부가 가능합니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공부하는 것. 오히려 수업을 듣는 것보다 자습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복습 개념이니 부담도 적었습니다.


이 계획이 정말 실현 가능할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전에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서 헬스장, 수영 등 운동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계획은 아닙니다. 아내에게 이 결정을 말했을 때, 아내는 흔쾌히 지지해줬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저녁에 계속 늦어지는 부분이었는데, 그동안 제가 노력한 과정들을 옆에서 계속 지켜봐 왔기 때문에 제 결정을 이해해줬습니다. "그동안 새벽에 해봤으니 이번에는 저녁에 해봐"라고 말해줬습니다. 10월을 돌아보면, 분명 실패한 부분도 있습니다. 자율학습 계획은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고, 지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장한 부분도 있습니다. 7월에는 정말 히라가나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일본어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제 삶의 습관으로 자리 잡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마인드셋도 달라졌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시간을 쪼개고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듀오링고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꾸준히 했습니다. 10월 31일 기준으로 139일. 100일이 넘도록 이렇게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행 중에도, 쉬는 날에도, 하루 단 5분이라도 했다는 것은 저에게 큰 의미입니다. 사실 살면서 이렇게 작은 것이라도 꾸준히 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데, 일본어를 하면서 생기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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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한 달은 제게 중요한 깨달음을 줬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다는 것. 이건 좌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장입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나에게 맞는 학습법과 환경 세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의지를 강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의지가 필요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9월에 저는 포켓몬스터의 주인공처럼 태초마을로 돌아갔습니다. 10월은 그곳에서 제 자신을 제3자의 관점에서 돌아본 시간이었습니다. 1단계를 결석 없이 모두 출석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전체 일정을 소화하면서 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시기상으로도 3개월 정도 해보고 다시 회고하는 느낌이라 나름 좋았습니다.


11월부터는 2단계에 다시 도전합니다. 이번에는 저녁반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벽 회사 출근이라는 새로운 루틴으로 시작합니다. 실패를 기반으로 다른 실행을 하는 것. 그동안 해보지 않은 방법과 나만의 상황에 맞춰서 변화를 준 것. 이것이 10월이 준 선물입니다. 나는 나를 믿지 않습니다. 대신 시스템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 안에서, 오늘도 해야할 일을 실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