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제2막

롤러코스터 인생

by SomeDay


드라마 대사처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인생 제2막' 같은 오글거리는 말을 참 싫어했다. 뭐 큰 역경을 겪고 나면 인생이 달라 보인다고? 그게 그 인생이겠지, 뭐가 다르겠어?

그런데 정말 달랐다.


20대 후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던 나는 30대에 지독한 사춘기를 겪듯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 인생을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견뎌왔을까 싶을 만큼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30대 후반 암이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내 인생은 더 떨어질 때가 없을 만큼 낭떠러지에 달랑달랑 걸쳐있었다.

잡고 있던 잡초 하나를 놀까 말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면서 나는 뭘 위해 버텼을까?

사실 버텼는지 버텨진 건지 모를 만큼 운이 좋았다.


걱정 많은 노모에게도, 마음을 터놓기 힘들 만큼 친하지 않은 언니에게도, 나보다 더 힘든 남편에게도 아무 말하지 못한 채 기댈 곳 없는 내 인생이 불쌍했다. 그저 징징거리며 누구라도 붙잡고 울면 될 것을 무슨 고집이었는지 나는 늘 괜찮은 척했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꽤 운이 좋게 지나갔던 내 삶이 어느 순간 남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기에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집에서 홀로 지내며 고양이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나의 첫 번째 고양이 가을이는 내게는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이다. 가족도 해주지 못한 위로를 나는 분명히 받았으니까.

두 번의 수술을 끝내고 나는 자궁이 없는 여자가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난소 한쪽은 살려놓아서 생리는 없지만, 호르몬은 나와서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됐다.


일단은 원인을 제거했으니 이제 암 제거 99.9%(혹시나 하는 0.01%의 불안감) 나는 그렇게 암환자에서 벗어났다. 언제나 그렇듯 큰 수술을 한걸 잊을 만큼 회복은 빨랐다. 수술 3개월 후부터는 요가도 다시 시작하며 몸을 움직였다. 가끔 통증이 느껴졌지만, 가볍게 운동을 시작하며 40살 생일을 맞이했다.


자궁적출 후 6개월이 넘으면 안정기라고 볼 수 있던 어느 날 남편이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인 친구를 만나러 다녀오라며 도쿄 여행을 추천했다. 내 인생에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앞서 거절을 했지만,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로 못 이기는 척 비행기 표를 끊었다. 고양이를 입양하고서는 해외여행을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권이 만료되어 여권 재발급부터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여행 가서 사서 입을 옷부터 필요한 물건들을 사느라 꽤 많은 지출을 했지만, 오랜만에 여행이 설레었다.


일본인 친구가 부산에 여행을 왔을 때 이미 한차례 만난 적이 있었고, 1년 넘도록 알고 지낸 언니여서 마음이 놓였으나 처음 가는 도쿄니까 공부를 해야 할 게 많았다. 게다가 내가 여행을 갔을 때만 해도 없던 트러블 카드부터 발급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여행도 못 갈 만큼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게 실감 났다. 넓디넓은 도쿄에서 가보고 싶은 곳들을 몇 군데 검색해 놓고 무작정 떠난 도쿄!


공항으로 마중 나온 언니와 시간을 보내고 호텔 체크인까지 함께 해줘서 긴장된 첫 도쿄여행은 어렵지 않게 넘어갔다. 여행동안 생각보다 날씨가 더워 걱정이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무지게 3끼를 먹으며 혼자 자유롭게 도쿄를 여행하고 언니와 일본어 한국어를 섞어가며 깊은 대화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도 보냈다.

처음 해보는 여행이라 걱정이 많았지만, 언니 덕분에 어렵지 않게 시간을 보냈고, 오랜만에 고양이들의 감시에서 벗어나 진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작지만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호텔방까지 대만족스러웠던 여행이었다.


그동안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막상 혼자 해외를 떠난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드라마를 보며 독학해 온 일본어도 오랜만에 쓰면서 나란 인간의 효용감이 발휘는 것이 좋았다.

전업주부로 살다 보면 많은 일을 하고 살지만, 막상 티 나지 않는 일을 하게 되다 보니 나의 가치가 낮아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 스스로 길을 찾아가고 뭔가를 해냈다는 느낌이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면서 나도 이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편안하게 걱정 없이 사는 내 삶을 부러워하겠지만, 나는 나대로 힘든 부분들이 있다. 30대를 순삭 하듯 지나온 나는 예전보다 살이 10kg 이상 찐 백수 아줌마일 뿐이다. 지나가다가 당연하게 아이가 있을 줄 알고 묻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없는 전업주부라고 하면 의아하게 보는 사람도 상당 수다. 또는 아이 얘기를 하며 훈수를 두기도 한다. 이런 시간을 오래 지나다 보면 자신감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된다. 누군가에는 부러운 내 인생이 나에게는 지옥이었다.


40대에 경력단절 여성이 새로운 일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자기 효능감을 살릴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하면서 나의 새로운 인생 제2막을 살아보려 한다.

별 다를 것 없겠지만, 잃어버린 30대보다는 좀 더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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