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키의 샛노란 머리색이 인상적이었던 나는 동양인은 아닌 것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외국인으로 오해받을 만큼 샛노란 머리색이 지금은 연갈색이 되었다.엄마는 천연 염색이라며 '내가 참 좋은걸 물려줬지'라고 하신다. 어릴 때 나를 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샛노랗던 아기가 이렇게 컸냐며 한마디씩 하신다. 어릴 때 가족 누구도 닮지 않아서 진짜 주워왔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래서 나는 늘 '주워왔다는' 놀림을 받고 자랐다. 작고 왜소한 나와 달리 풍채가 남달랐던 언니와 엄마는 평균이상의 키를 가졌다. 아빠는 그 옛날 사람치고는 아주 큰 키를 가지셨고 짙은 쌍꺼풀과 검은 피부의 준수한 외모를 가지셨다.
안타깝게도 아빠의 외모는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다.
흔하디 흔한 이름을 가진 나는 학급에 꼭 동명이인이 한 명쯤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친자매인지 모를 만큼 서로 이름이 생뚱맞은 우리는 성격도 정반대이다. 돌림자가 왜 없냐 하니 동네 이장님이 읍내에 가는 길에 내 이름을 부탁해지었다고 한다. 참 성의 없는 작명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곧을 정(貞)이 들어간 이름을 가졌다. 내가 아들이 아닌 것에 엄마가 화가 났었나 보다.
엄마는 결혼 후 7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반면 큰아버지네와 함께 살았는데 다복한 9남매를 두었다. 해마다 배가 불러오는 큰엄마를 보며 엄마는 부러워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시부모님의 눈치를 봐야 했지만 다행히도 아빠는 단 한 번도 아이문제를 얘기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난임생활을 하는 동안 나에게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대신 엄마한테는 '자네를 닮아서 그런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외할머니도 엄마를 7~8년만에 낳았다고 한다. 부잣집 첫째딸로 유복하게 태어나 사랑을 받고 자란 엄마였다.
엄마를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나는 30대에 접어들면서 살이 찌고 엄마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언니도 닮아갔다. 남편은 셋다 너무 똑같이 생겼다며 웃었다. 언니도 나이가 들수록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엄마 얼굴이 나와 섬뜩하다고 했다.
유전자의 힘은 대단하다. 여러 명이 섞여있어도 가족임을 판별해 준다. 게다가 성격도 점점 닮아간다.
저것만은 닮지 말아야지 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엄마의 집착이라던가 고지식함, 올곧음 등 많은 것들을 우리는 물려받았다. 내가 아는 엄마는 30년 가까이를 비바람이 쳐도 결석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매일 출근도장을 찍고 아파도 직장에서 쓰러지는 사람이었다. 반면 아빠는 술을 좋아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술을 마신 다음날은 출근을 하지 않는 한량이었다. 나랑 언니는 아빠와 엄마를 각각 닮았다. 나는 안타깝게도 아빠쪽이였다. 눈물이 많고 정도 많지만 매사가 똑 부러지지 못해 엄마는 늘 불안해하신다. 게다가 술까지 좋아하니 불안할 수 밖에..
우리의 모습과 성격은 부모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닮지 말아야 할 것 들까지 흡수해 버린다. 그리고 자식이 생기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내가 왜 이러지'라며..
물론 단점만 닮는 것은 아니다. 정 많은 아빠의 모습을 닮은 나는 엄마에게는 안식처이다. 냉정한 언니와 달리 거절을 못하는 나는 엄마의 든든한 딸이다. 요즘 엄마랑 드라이브를 가거나 하면 늘 '딸이 데리고 다녀서 좋으시겠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엄마 친구들도 또 딸이 데리러 왔냐며 부러워한다. 엄마와 아빠는 성격이 정반대였지만 매일 싸우면서도 늘 같이 맛있는 것을 드시러 외식을 다니셨다. 늙어서도 오늘은 뭐 먹을까 하면서 아빠는 엄마가 열심히 번 돈으로 호강을 하셨다. 그런 엄마는 아빠가 싫지 않았고 평생을 먹여살렸다. 매일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왜 계속 사는 거야라고 묻는다면 아마 그 속사정은 우리가 모르는 데 있을 것이다. 그 관계를 유지하는 밑바탕에는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다음생에 태어나도 아빠를 만나겠다고 했다. 사고 치는 아빠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서는 다음생에 다시 만난 다니 참 웃기는 말이었다. 다음생에는 꼭 제대로 잘 살아보겠노라 다짐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 많은 고생을 할 만큼 우리 엄마는 아빠를 참 많이 사랑했구나...
'엄마 그런데 아빠는 동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