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악에 관하여. 팡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함께.
본 글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시놉시스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
과연 악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가?
영화의 시작, 우리들의 아이러니
영화는 시작부터 기괴한 소리와 관객이 함께하도록 유도한다. 2분 11초라는 시간 동안 관객은 소리에 집중하게 되고 시각을 잃는다. 불안감과 불쾌감이 증폭되어 이 상황이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새소리가 들려오고 화면이 밝아지며 회스가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 관객들은 안심한다. 어둠의 체험에서 벗어난 관객은 회스의 가족을 보고 안심한다.
오프닝의 기괴한 소리에서 벗어나 회스가의 모습을 보며 안심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구성이다.
불편함을 피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특성을 학살에 동조한 자들을 통해 해소하는 역설을 보여주는 탁월한 방식이다. 첫 장면이기에 저들을 악인이라고 인식 할 수 없는 것도 악의 평범성에 대한 연출으로도 보인다.
이때부터 영화는 우리에게 두 가지에 대해 말한다. 영화의 제목인 관심지대(The zone of interest)와 그의 역인 비관심지대. 관심지대는 나치들이 수용소와 벽 하나를 두고 살던 아우슈비츠의 외부를 말하고, 비관심지대는 장벽 너머의 아우슈비츠 내부 되는 것이다.
오프닝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기괴한 소리와 어두운 화면을, 피하고자 하는 비관심지대로 결정하고, 새소리와 자연, 평화가 있는 회스가의 모습을 관심지대로 결정한다.
기괴한 음악과 어둠은 피해자들의 것이고, 평화로운 빛은 가해자들의 것이다. 우리의 관심지대는 어디인가? 영화가 진행되며 지속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다음 날 아침 의도적으로 아이들은 회스의 서프라이즈 선물을 위해 잠시동안 회스의 눈을 가린다.
이는 놀이이며 오프닝의 2분 11초와 같은 짧은 암흑의 체험이다.
영화를 보러 온 관객, 서프라이즈 이전의 회스와 달리 비관심지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암흑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영겁의 암흑이다.
실제로 위 장면에서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총소리, 비명소리, 절규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찰자 시점
수많은 홀로코스트 영화와 달리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피해자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회스 가족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면서 그들 주위에 유대인들이 하나 둘 지나다니게 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하여금 그들에게 관심을 주기 어렵게 만들고. 회스 부부를 관찰하게 만든다. 카메라 앵글은 그들을 cctv로 지켜보듯한 방식으로 찍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관심 지대와 비관심 지대
영화의 관심지대(the zone of interest)는 회스가의 집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뛰어노는 모습, 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들, 아름다운 자연.
감독은 카메라 통해 회스가를 보게 하지만 벽 너머의 세계인 무관심 지대에서 들려오는 비명, 절규, 총성과 같은 청각적 요소와 연기등의 후각적 요소를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눈을 감으면 보지 않을 수 있다. 다른 곳을 보면 되니까. 외면을 통해 다른 곳에 관심(interest)을 두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고 늘 해오던 행동들이다. 하지만 맡지 않으려고 코를 막거나,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는 것은 우리의 삶에 불편함을 주고 영향을 준다. 회스가는 시각을 포기하는 데는 성공한 듯 보이지만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회스부인 헤트비히가 아이에게 꽃을 보여주고 또 정원 내에 많은 꽃을 두는 것은 시각적인 외면과 후각적인 외면을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녀는 벽을 포도나무로 덮어서 외면하려 한다. 이는 시각적, 후각적 외면을 위한 것이기도, 나치의 잘못을 덮으려고 하는 역사왜곡에 관한 상징이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불을 끄고 다니는 루돌프 회스
영화에서 회스는 방의 불을 하나하나 끄고 다니는 루틴을 자주 보여주는데, 이는 매일 학살을 행하는 그가 세상에 어둠을 가져오는 것과 같이 보인다. 이때 불을 껐다 다시 키는 순간이 있는데 딸아이의 몽유병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딸아이는 공상에 빠져있어 보인다. 무엇을 하고 있냐는 회스의 다정한 질문에 딸아이는 설탕을 주고 있다고 답한다. 누구에게 주냐고 묻는 회스의 이어진 대답에 딸아이는 찾고 있다고 답한다.
아이에게 수면장애가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매일같이 비명소리를 백색소음으로 들으며 잠을 청한다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설탕을 나눠주는 선행을 위해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아이의 선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밝은 공간의 빛을 빼앗아가는 회스의 모습과 결코 행동하지 못하는 딸의 모습을 같이 보여준다.
이는 세상에 고통이 있음을 알면서 행동하지 못하는 우리와 동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잠 못 드는 회스가
둘째 딸아이 잉에뿐만이 아닌 회스가 의 모든 사람들은 잠을 편히 청하지 못한다. 꼭 작은 불빛을 켜두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불을 모조리 껐을 때 시작되는 오프닝과도 같은 순간, 즉 암흑 속의 비명들 때문일 것이다.
헤트비히의 어머니 리나가 회스가의 집을 방문하고 이틀을 못 버티고 나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아름다운 것만 본다고 상황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리나에게 정원의 꽃들에 관해 설명하는 회스부인의 말 이후, 감독은 꽃 하나하나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동시에 오프닝의 체험을 다시 하게 만드는데 아름다운 꽃을 보여주며 서서히 비명소리를 키운다. 결국 화면은 완전히 붉은색으로 변하고 비명도 끊긴다. 이어지는 침묵은 심장을 뛰게 한다.
오프닝과 다르게 이제 관객은 아름다운 것을 봐도 아름답게 보지 못한다. 회스가에 대해 모르던 오프닝에서는 기괴한 소리에 이은 자연과 회스가족에 안심했지만 더 이상 그러지 못한다.
구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회스의 구토 장면이다. 업무를 마친 회스는 어두운 계단아래로 내려가던 중 구토를 시도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는 못한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이동진 평로가의 한줄평을 가장 좋아한다. [이미 다 소화해 버린 악에 대하여 (...)]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영화 중간중간 회스는 축구경기의 소식을 전해 듣고, 회스 부인의 치장을 한다. 그들은 성공에 관심이 있고 그들이 행하고 있는 선악의 문제, 인간적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의 명예, 돈, 권력, 오락만을 추구한다. 여기서 주어를 바꿔보자.
우리의 관심, 성공, 성취, 오락.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전쟁, 범죄, 고통, 기아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회스를 보고 역겨움에 구역질을 하듯이 회스도 우리를 느끼며 구역질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시대를 넘어 현재로 넘어오는 장면을 보면, 또다시 비관심지대가 되어버린 아우슈비츠 박물관, 무덤덤하게 청소하는 청소직원들, 여전히 무관심한 우리를 보고 있자면 회스가 더 이상 구토를 하지 않고 지하로 내려가는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회스는 현재의 우리를 본 것이다. 여전히 구역질 나는 우리를. 그리곤 자신이 별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다시 암흑과 기괴한 비명소리를 들려주며 끝이 난다. 엔딩의 이 기괴한 소리가 가장 불쾌하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단순히 나치의 만행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홀로코스트 영화들과 동일시하지 않는 점은 현재에도 여전히 우리들의 비관심 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 고통이 범람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메시지처럼, 지금 현재에도 우리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해 반성해야 하고 관심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면 될 것인가? 영화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좀 가지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
나는 더 나아가고자 한다. 무뎌진 청소부들처럼 우리도 뒤돌아서면 이런 연민, 분노, 동정에서 멀어지고 다시 우리의 관심지대 오락, 즐거움, 안락으로 돌아올 것이다. 우린 여기서 머물러선 안된다.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끔찍한 참상의 홀로코스트, 600만 명의 인간이 죽어나가는 순간 속 인간의 무관심에 대한 체험을 보여주며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영화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며 우리는 다시 우리의 관심지대로 우리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회스와 다르다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과연 이렇게 비참한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해야겠다.
팡세(1690)-블레즈 파스칼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르다.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에게 그 위대성을 지적해 주지 않고, 그 얼마나 금수와 같은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또한 그에게 그 비열함을 지적해 주지 않고 그 위대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양자를 제시해 주는 것은 매우 유효한 일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금수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천사와 같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마땅히 그 양자를 다 알고 있어야 한다.
팡세 341 <418>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비참하면서도 위대하다. 영화는 우리의 비참함을 지적해 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비참함만을 가지고 살 수는 없다. 영화 속의 피해자들 그리고 현대의 피해자들의 고통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인간은 의식하지 않으면 비참하지 않다. 파괴된 집은 비참하지 않다. 비참한 것은 인간뿐이다.
<우리는 화난에 부딪친 사람이로다.>
인간은 사욕 속에서도 위대하여 그 속에서 하나의 훌륭한 기준을 세울 줄 알았으며, 그 속에서 어떤 인자한 일면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팡세 325 <399>, 327 <402>
우리가 회스와 다른 것은 우리는 우리의 모순을 안다는 것이지 않을까? 의식하지 않고 외면하면 비참하지 않을 것이다. 파스칼의 위로처럼 인간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기에, 죄의 상태에 있다는 인식이 곧 비참함이 되고 이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위대한 이유이다.
"죄의식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죄를 느낄 줄 아는 마음에 비례한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시험과 오류, 김연경]
A.P.R 위대함과 비참함
비참함은 위대함에서, 그리고 위대함은 비천함에서 귀결되므로 어떤 사람은 비천함의 논거를 위대함에 두어 더욱 적절하게 비천함을 결론짓고, 다른 사람은 비천함 자체에서 위대함을 결론지었다. 한편 이 위대함을 표시하려고 말한 모든 것은, 다른 한편이 비천함을 결론짓고자 한 의론에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높은 데서 떨어질수록 더 비참하며, 그 반대도 역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끊임없는 원을 그리면서 서로 움직이고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인간은 빛을 많이 가짐에 따라 인간 속의 위대함과 비천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가 비천함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비참하다. 왜? 사실상 비참하니까.
그러나 그는 대단히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알고 있으므로.
팡세 339 <416>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다시 영화의 질문으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영화관을 나서며 다시 우리의 관심지대로 돌아갈 것이다. 더 많은 고통을 해소해야겠다는 생각과 인류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말이다.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애도와 동정을 줄 수 있지만 지속적인 행동으로서는 어렵다. 또 고통을 받는 자들이 그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엔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저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의 입을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준다.
실천적 사랑과 공상적 사랑
당신의 사랑은 오직 공상 속에서만 살아 있을 뿐, 당신의 일생은 마치 환영처럼 어른거리다가 없어지고 말겠지요. 그렇게 되면 내세에 대한 생각도 사라져 버리고 마침내는 아무런 위안도 느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당장 행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자기가 옳은 길을 걷고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특히 중요한 것은 거짓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거짓을,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을 범하지 말아야지요. 자기가 지금 거짓을 행하고 있지 않나 매시 매분마다 반성해 보십시오. 또 한 가지 피해야 할 것은 증오입니다. 자기에 대한 것이든 남들에 대한 것이든 일체 미워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추악하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자기 내부에 그럴 만한 요소가 잠재해 있기 때문이란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으면 깨끗이 사라지고 마는 법입니다. 두려움 또한 피해야 합니다. 물론 두려움이란 온갖 거짓에서 생겨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지요. 그리고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자기의 소심한 마음을 결코 탓해서는 안됩니다. 설사 자기가 일시적으로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결코 낙심해서는 안되지요.
[....]
공상적인 사랑은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해 그 자리에서 만족할 만큼 성과를 거두기를 바라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고 마치 무대 위의 연극처럼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들의 주목과 찬사를 받기 위해서는 마침내 생명까지라도 내던지겠다고 나서게까지 되고 말지요.
그렇지만 실천적인 사랑은 그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묵묵한 노동과 인내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훌륭한 학문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미리 간에 말해 두지만 실천적인 사랑이란 아무리 애써도 좀처럼 목표에 이르지도 않고 오히려 목표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되지요. 그렇지만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홀연히 그 목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비로소 우리를 사랑하시고 남몰래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카라마조프 형제/도스토옙스키/최경준 옮김 - <홍신문화사> p.79-80
영화관을 나오며 온 세상을 사랑하겠노라고, 고통을 없애겠노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상적 사랑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내 발을 밟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즉시 이런 사랑은 사라질 것이다. 파스칼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다.
양파 한 뿌리
지옥에 떨어진 한 아줌마에게 마지막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주어지는데, 바로 그녀가 살아생전에 행한 유일한 선행(양파 한 뿌리를 적선한 것)의 상징인 양파 한 뿌리를 지옥 불 속에 떨어뜨려 그것을 잡고 올라오도록 하는 것이다. 한데 옆에 다른 죄인들이 매달리자 아줌마는 자기만 살겠다면서 사람들을 밀어 떨어뜨리다가 다시 불속에 빠지고 만다.
[ 이반 카라마조프의 시험과 오류, 서울대학교 외국문화연구 제69호, 김연경 2018]
이 양파 한 뿌리라는 초라한 선행이자, 사랑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방향이다. 요한복음 12:24의 "작은 밀알 하나"와 같은 작은 사랑만으로도 우리는 지옥을 빠져나올 기회를 부여받는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단절의 순간을 지옥으로 바라본다. 그럼에도 양파 한 뿌리라는 작고 초라한 사랑에 의한 조금의 틈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삶을 천국으로 바꿀 수 있다.
조시마 장로의 담화와 실천적 행위의 핵심은 '우리 모두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으로, 그는 용서를 천국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지옥으로 설교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타난 러시아 수도사의 의미와 역할, 권철근]
사과를 심는 폴란드 소녀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실존 인물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코워제이치크를 모티브로 한 이 폴란드 소녀는 회스가 모든 불을 끄고 나서야 등장한다. 온 세상에 어둠이 내린 상황에서 소녀는 포로들이 '사과 한 알'을 먹을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한다. 앞서 소개한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 중 뒷부분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 체온으로만 볼 수 있는 선에 관하여]
회스(나치, 악)에 의해 빛이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열을 통해 소녀를 느낄 수 있다. 이는 빛을 없애더라도 느낄 수 있는 체온 즉, 회스가 외면한 선이자 인간의 신비이다.
소녀의 이런 모습은 회스의 둘째 딸 잉에가 실천하지 못한 설탕을 나눠주는 공상과 반대의 실천이다. 조시마 장로의 실천적 사랑과 공상적 사랑의 설명과 들어맞는 부분이다.
하지만 소녀가 사과를 심음으로 인해서 그것을 발견한 포로들끼리 싸우고 처형된다. 이런 아이러니마저도 조시마 장로의 말과 들어맞는다. [(...) 아무리 애써도 좀처럼 목표에 이르지도 않고 오히려 목표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되지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실천적 사랑을 하며 좋은 일이 생기기도 오히려 나쁜 결과로 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실천할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홀연히 그 목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비로소 우리를 사랑하시고 남몰래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결론
영화는 파스칼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비참함과 위대함을 가져다준다. 비참함은 회스와 닮은 우리를 통해서, 위대함은 비참함을 인지하고 행동한 폴란드인 소녀를 닮은 우리를 통해서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4년에 개봉한 영화 중 단연 압도적으로 높은 평가를 주고 싶은 영화이자.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글에 담아내지 못한 연출, 미장센, 역사, 상징에 대한 부분이 아쉬울 따름이다.
조나단 글래이져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통한 질문에 대한 인식은 파스칼의 팡세를 통해, 인식 이후의 행동은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그리고 깨달음의 길로 이끄시고 사랑을 알려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좋은 모범을 보이다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쭈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아멘.
누가복음 10:25-37 KRV
참고문헌:
[ 도스토옙스키의 실천적 사랑, 서강대학교 대학원 신문사, 고려대학교 석영중 교수 2017]
[ 이반 카라마조프의 시험과 오류, 서울대학교 외국문화연구 제69호, 김연경 2018]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타난 러시아 수도사의 의미와 역할, 권철근]
팡세, 블레즈 파스칼, 문화광장, 정상훈 옮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문학동네, 김희숙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