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INONIA와 목숨을 바친다는 것. C.S 루이스와 함께.
본 글은 그린 북(2018)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시놉시스
언제 어디서든 바른생활! 완벽한 천재 뮤지션 돈 셜리
원칙보다 반칙! 다혈질 운전사 토니
취향도, 성격도 완벽히 다른 두 남자의 특별한 우정이 시작된다!
1962년 미국, 입담과 주먹만 믿고 살아가던 토니 발레롱가는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된다.
백악관에도 초청되는 등 미국 전역에서 콘서트 요청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돈 셜리는 흑인에게는 여전히 위험하기로 소문난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투어 기간 동안 자신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토니를 고용한다.
거친 인생을 살아온 토니와 교양과 기품을 지키며 살아온 셜리. 생각, 행동, 말투, 취향까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그들을 위한 여행안내서 '그린 북'에 의존해 특별한 남부 투어를 시작하는데...
KOINONIA, 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Koinonia)는 그리스어 단어 κοινωνία에서 전자된 것으로, 친교, 공동 참여, 교제, 공유, 합동, 기부, 교통과 같은 개념을 뜻한다.
본 글은 영화 "그린 북"을 코이노니아의 가치를 통해 바라보면서 토니와 셜리, 그리고 우리의 코이노니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해결사 토니 발레롱가
토니는 문제 해결이 매우 뛰어난 인물로 나이트클럽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로 묘사된다. 그의 입담과 문제 해결 능력은 좋은 평판으로 이어지며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토니의 이 첫 장면만 보면 마틴 스콜세지의 카지노(1995)와 좋은 친구들(1990)에서 나오는 이탈리아 마피아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가 일터에서 벗어나 가정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면 그는 가정이라는 확고한 공동체를 형성한 인물로 보인다. 냉혈한의 이미지나 주먹밖에 모르는 범죄자가 아닌 단지 거친 일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으로서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토니도 그 시대의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퇴근한 다음 날 집에 친구들과 가족들이 가득한 모습을 본 토니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장인어른은 이탈리아어로 자기 딸을 저런 검둥이들과 함께 둘 수 있냐고 질문한다.
정작 돌로레스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음료를 나누어주고 있는데 말이다. 토니는 이에 한술 더 떠 그들이 사용한 물컵을 버려버린다. 돌로레스는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 안타까워한다.
가정과 친구들 간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토니가 이런 면에서는 부족해 보인다.
토니와 두 번의 면접
나이트클럽이 문을 닫자 토니는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던 중 어떤 박사가 운전기사를 찾는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면접을 보러 간 그는 면접 장소가 카네기 홀이라는 사실을 알고 의아해한다. 그가 생각한 박사는 의사였던 것 같다.
토니는 면접을 보기 전부터 푸대접을 받게 되는데, 이는 셜리의 비서 아미트가 그를 교만하게 대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미트는 다른 면접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교만하게 대하는데 이렇게 격식 있고 교양 있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교만함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차별은 인종뿐만 아니라 돈, 취향, 교양 등 여러 이유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 셜리 박사의 집은 첫인상부터 매우 독특하게 다가온다. 황금빛 장식, 거대한 상아, 심지어 왕좌까지 갖춘 그 공간은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선다. 이처럼 그의 맥시멀 한 인테리어는 단지 취향을 넘어서 그가 지향하는 정체성을 반영한다. 전통적 고귀함으로 가득 찬 그의 집은 셜리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상적인 자아의 투영인 셈이다.
그러나 셜리는 집 밖, 사회 속에서는 이러한 전통적 복장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는 사회로부터 억압받는 그의 정체성이자 외부 세계와 맺은 일종의 타협이기도 하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공간 안에서는 온전히 ‘자신’이고자 한다.
토니와 셜리의 대조적인 성격은 영화의 큰 흥미 요소 중 하나다. 당시 사회의 백인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클래식 음악, 박사학위, 카네기홀 꼭대기의 집, 세련된 말투와 태도, 취향을 지닌 셜리 박사와, 교양 없이 거친 말투와 사투리를 사용하는 토니는 여러 면에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셜리에게서 일부 귀족적 태도 즉 교양과 품격을 갖추었으면서도 타인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성향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태도가 그의 ‘코이노니아(교감 혹은 공동체적 연대)’를 어떻게 방해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영화가 주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토니가 카네기홀 면접 대기실에서 받은 냉대와는 달리, 또 다른 형식의 면접 장소인 바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동양인 바텐더는 토니를 예의 있게 대하지는 않지만 그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에겐 교만의 씨앗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바텐더가 술이 없다고 말을 끊으려는 백인 손님에게 “닥쳐, 지금 말하고 있잖아”라고 소리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통해, 그는 이미 오래전에 이국의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토니가 또 다른 면접 장소로 향하자 그를 반기는 것은 지역 마피아들이었다. 그들은 토니가 이전에 문제를 잘 해결해 주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용돈 벌이할 일이 하나 있는데, 관심 있으면 말하라"라고 넌지시 제안한다. 토니가 어떤 일이냐고 구체적으로 묻자, 그들은 "뭐 이런저런 일이지"라며 슬쩍 말을 흐린다. 마피아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이 제안이 불법적인 일임을 즉각 눈치챘을 것이다.
이에 토니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며 그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이때 마피아 중 한 명의 말이 유독 인상 깊게 다가온다.
“헛소리하지 마. 용돈도 좀 벌고 부인 선물도 사주고 그러면 좋잖아.”
그들에게는 부정을 저질러도 결과적으로 선물 하나쯤 사다 주면 만족하는 그런 삶의 방식이 익숙한 듯하다.
토니는 끝까지 예의를 지키며 그들의 ‘코이노니아’를 조용히 거절한다.
마피아들의 아내들과는 달리, 돌로레스는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토니가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토니 역시 누구보다도 아내의 그런 마음을 잘 알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손을 털고 위험한 면접장을 빠져나왔을 것이다. 물론 시계를 전당포에 맡길 정도로 궁핍한 상황에 놓인 토니에게는 일자리가 간절했을 것이다.
이튿날, 토니의 집으로 셜리 박사로부터 면접 합격 소식이 전해진다. 전화를 받는 토니 부부의 뒷배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는데 이 작은 디테일은 이후 나의 감상 편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
출발하기 전 토니는 그린 북을 받게 되는데 이는 흑인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 북이다. 이 책의 내용에는 흑인들만 이용 가능한 숙소부터 식당, 흑인이 하면 안 되는 행동 등 자세하게 들어가 있는 책자이다.
토니가 8주간의 투어를 위해 집을 떠나게 되자 아내 돌로레스는 깊은 아쉬움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토니의 결혼생활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순간으로, 그의 가족을 향한 애정과 유대 즉, 코이노니아의 모습이 따뜻하고 완전한 형태로 그려진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가 토니의 여행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통해, 그가 얼마나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인지를 엿볼 수 있다.
같이 마셔줄 사람이 필요하면..
투어를 시작한 토니와 셜리의 첫 대화 장면은 짧은 시간이지만 두 인물의 성격과 관계를 단번에 드러낸다.
셜리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반드시 준비해 달라고 요구하며 매일 밤 위스키도 갖춰 놓으라고 말한다. 이에 토니는 “같이 마실 사람이라도 필요하신가요?”라는 식으로 농담 섞인 말을 건넨다. 그러나 셜리는 “필요 없습니다”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토니의 친근한 접근을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또한 셜리는 앞 좌석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토니는 “연기는 제가 마시는 거잖아요?”라고 반문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응한다. 이에 셜리는 간단히 “Thank you”라고 답하며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인다. 토니의 말장난이나 반항적인 반응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는 셜리의 고상한 거절은 토니에게 특이한 인상을 남긴다.
토니가 다시 말을 이어가자, 셜리는 “조용히 좀 가죠”라며 그의 말을 또다시 막아선다. 하지만 토니 역시 만만치 않은 성격이다. 그는 “그 말투, 우리 마누라가 하는 거랑 똑같네”라며 오히려 셜리의 반응에 맞서 계속 말을 잇는다.
돈 셜리 박사의 교만
나는 이 영화를 감상하며 196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셜리가 겪어야 했던 차별과 고난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깊이 느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적인 이유만으로 그가 받아야 했던 멸시와 차별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셜리를 ‘완전한 피해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셜리와 토니의 첫 식사 장면에서, 셜리는 토니에게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 이에 토니가 “짜다(salty)”라고 대답하자, 셜리는 음식 평론을 해보는 건 어떠냐며 비꼬듯 말한다. 셜리의 빈정거림을 눈치채지 못한 토니는 “돈이 좀 되냐?”라고 순수하게 되묻는다. 이 장면은 셜리가 인종 간 차별의 맥락에서는 분명 피해자이지만, 교양의 수준이나 문화적 격차를 기준으로 한 차별의 시선에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토니의 “짜다”는 말은 단순하고 악의 없는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셜리는 왜 그를 무시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교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C.S. 루이스는 교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라는 것입니다. (...)
여러분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입니다. 즉 남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눈을 내리깔고 보는 한 자기보다 높이 있는 존재를 결코 볼 수 없습니다. (...)
교만은 모든 악의 본질이며, 다른 죄는 단지 교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
교만은 영적인 암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나 자족하는 마음, 심지어 상식까지 갉아먹습니다.
순전한 기독교/C.S 루이스/정경철, 이종태 옮김/홍성사 p.192-203
영화에서 집중되게 다루지 않지만 셜리의 교만이 그의 삶에서 가장 문제 되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의 교만의 결과는 어떤 모습일까?
스스로 쌓은 탑
영화는 곧바로 셜리의 외로움을 단 한 장면으로 강렬하게 보여준다. 트리오의 일원인 올레그와 조지가 함께 식사하며 웃고 있는 반면 셜리는 홀로 높은 곳에 앉아 조용히 위스키를 마신다. 그는 마치 자신과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두고 있는 듯하다. 물론 올레그와 조지는 셜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를 배제하거나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셜리가 혼자 있는 이 장면은 결국 그의 자발적 선택에 가깝다.
앞서 토니가 술을 함께 마시자고 권했을 때도 셜리는 단호히 거절했다. 셜리는 차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품위와 교양이라는 껍질을 쌓아왔고 그것은 점차 방어기제로 작동하며 ‘교만’의 형태로 굳어졌다. 그런 교만은 타인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코이노니아 즉, 진정한 친교와 연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셜리를 바라보는 토니의 시선에는 연민이 담겨 있다.
그를 측은하게 내려다보는 토니의 모습은 무엇으로 비유될 수 있을까? 티끌과 같은 교만의 이유로 아래를 쳐다보느라 인지 못하는 위쪽의 존재(הָיָה)이지 않을까?
교만이 쌓은 벽, 벽을 허무는 코이노니아
물론 셜리 박사가 완전히 교만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분명 교양 있고 매너 있는, 멋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 안에 깃든 티끌 만한 교만은 그의 내면에 견고한 벽을 세우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모습은 토니와 함께 라디오를 듣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당대 최고의 흑인 스타들이었던 리틀 리처드, 처비 체커, 샘 쿡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토니는 열광하며 반가워한다. 반면 셜리는 그들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음악은 처음 듣는다고 말한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토니는 “어떻게 그들을 모르냐”며 “그들은 당신네 사람들(your people)”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셜리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버린다.
이 장면은 셜리가 외부로부터 얼마나 많은 편견에 시달려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편견에 저항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의 인종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취향을 고수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흑인 음악은 ‘좋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좋아해선 안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체성에 대한 갈등, 편견과의 싸움은 그에게 또 하나의 벽을 쌓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선택이 언제나 옳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것은 교만의 그림자가 스며들기 쉬운 지점이기 때문이다. 편견과 차별의 시선에 저항하며 세운 벽이 결국은 또 다른 형태의 단절을 낳았고, 그 단절은 셜리를 세상과 고립시켰다. 그는 세상의 상처를 피하려 했지만, 그 상처를 감추는 방식이 또 하나의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가족은 있어요?
가족에 대한 토니의 질문에 셜리는 명확하게 답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을 아낀다. 그는 한때 결혼했지만 음악가로서 끊임없는 투어 생활은 부부 관계와 양립하기 어려웠기에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동생이 한 명 있지만, 마찬가지로 음악 활동으로 인해 자주 연락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 대화는 두 인물의 삶에서 ‘우선순위’가 어떻게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앞선 장면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 토니에게 삶의 중심은 가족이다. 그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더라도 그것이 가족과의 관계를 해치거나 가족에게 피해를 준다면 단호히 거절한다. 만약 토니가 셜리처럼 가족과 직업 사이의 갈림길에 섰다면, 아마 그는 망설임 없이 직업을 포기했을 것이다. 대신 그는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가족을 선택한 셈이다.
반면 셜리는 음악이라는 직업,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부와 명예를 택했다. 여기서 셜리가 부와 명예를 욕망해서 선택했을 것 같진 않다. 그는 앞선 이유와 같이 차별에 맞서 이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선택은 그를 정상에 올려놓았지만, 동시에 가족과의 거리를 만들어냈다. 삶의 무게추가 어디에 놓였는지를 두 인물의 선택이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둘은 켄터키에 도착하고, 토니는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을 먹을 기회에 들뜬다. 그는 곧장 치킨집으로 향하며 소년처럼 기뻐한다.
벽을 허무는 코이노니아
영화 속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인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을 먹는 장면은 관객 모두를 미소 짓게 만든다. 토니는 셜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코이노니아의 가치에 따라 먼저 손을 내민다. 그리고 셜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쌓아왔던 단단한 벽은, 토니가 먹던 치킨 한 조각을 건네는 그 작은 행위로 인해 처음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마치 성경 속 코이노니아의 본질을 떠오르게 한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2-47 KRV
성경에서는 사도들이 함께 떡을 떼고 음식을 나누는 장면을 통해 코이노니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속 장면 역시 이와 닮아 있다.
토니는 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다는 셜리에게 “흑인들이 좋아하는 게 옥수수랑 치킨 아니냐”라고 장난스럽게 말한다. 셜리는 불쾌해하며 “모든 흑인이 그런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라고 반응한다. 이에 토니는 “누가 이탈리아 사람한테 피자랑 파스타 좋아하냐고 해도 기분 나쁘지 않다”며 맞받아친다. 셜리가 다시 반론을 제기하려 하자 토니는 대화를 끊고 치킨을 셜리에게 내민다. “먹을 거냐 말 거냐”는 그 단순한 말은, 이론이나 논쟁을 넘어선 ‘함께함’의 초대였다.
토니에게 인종차별이나 편견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관심은 단 하나, 친구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진짜 우정을 시작하는 것 코이노니아 그 자체다. 그렇게 셜리는 얼떨결에 그 순간에 참여하게 되고, 짧지만 따뜻하고 웃음 가득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셜리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그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음을 조용히 알려준다.
자신도 허물지 못하는 벽
숙소에 도착한 토니와 셜리는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진다. 남부로 내려갈수록 백인과 흑인이 사용할 수 있는 숙소가 분리되는 모습은, 1960년대 당시의 인종차별이 얼마나 노골적이고 일상적인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저녁을 보낸다. 차별의 현실 속에서도 그들은 점차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먹고 마시며 어울리던 사람들 중 한 무리가 인원이 부족하다며 함께할 사람을 찾는다. 그들은 셜리에게 다가와 함께하자고 권유하지만, 셜리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셜리의 오래된 관성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익숙한 고립, 스스로 쌓아온 거리감은 그를 여전히 타인과의 사이에 머뭇거리게 만든다.
혼자 위스키를 마시고 있던 셜리는 함께 어울리자는 제안을 조용히 거절한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비아냥을 던진다. 그들의 비난은 셜리의 품위와 교양에 대한 또 다른 방어기제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일 하기엔 너무 고귀하신가 봐요?”
“내버려 둬, 양복 더러워질까 봐 그러는 거겠지.”
이 장면은 앞서 말한 것처럼 차별과 편견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쌓은 벽이 오히려 또 다른 단절을 낳는 이유를 보여준다. 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쌓아온 벽은 허물어야 할 순간에조차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나조차 치워내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함께해야 할 순간에, 셜리는 여전히 그 벽 안에 홀로 서 있다.
그날 밤, 셜리는 다시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떠난다. 진심으로 손을 내민 이들과 연결될 수 있었던 기회를 그는 또 한 번 고요히 놓치고 만다.
결국 셜리는 외부 술집에서 위스키를 주문했다가 집단 린치를 당한다. 세상은 그에게 끝없이 가혹한 시련을 안겨준다. 그는 누구보다 품위 있게 살아가려 했지만 세상은 그의 품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셜리는 차별과 편견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벽을 쌓았다. 그러나 그 벽은 결과적으로 같은 인종과의 친교마저도 어렵게 만들었다. 동시에, 사회가 이미 세워놓은 또 다른 벽은 그가 다른 인종과 진정으로 연결되는 길조차 가로막았다. 그렇게 셜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언제나 상처 입은 모습으로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예전에 다룬 적 있는 백치-존재의 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에서 다룬 것과 같은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 외로움은 단순한 외톨이의 모습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고통의 무게를 담고 있다. 차별은 셜리를 고립시켰고, 교활하게 세어 들어온 교만은 그 고립을 더 두텁게 만들었으며, 결국 그는 코이노니아가 부재한 삶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셜리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준 인물이 바로 토니다. 물론 토니 역시 결코 완전한 인간은 아니다. 그는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기도 하고 거칠며 때로는 편법을 일삼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셜리에게 필요했던 결정적인 것이 있었다. 바로 코이노니아의 감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고 유지할 줄 아는 힘이다.
토니는 어느 순간부터 셜리를 더 이상 ‘흑인 고용주’로 대하지 않는다. 그는 신분과 인종을 넘어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의 거친 말투와 투박한 행동 속엔 오히려 진심이 담겨 있고, 그 진심은 셜리의 단단한 외벽에 조용히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셜리에게 토니는 단순한 운전기사가 아니다. 그는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온 셜리에게 처음으로 함께 웃고, 먹고, 싸우고,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을 선물한 존재다. 토니의 존재는 셜리가 잃어버렸던 관계의 감각, 잊고 있었던 따뜻함을 다시 일깨워준다.
셜리가 토니에게 준 것
그렇다면 셜리는 그저 토니에게 받기만 한 존재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셜리는 토니의 삶, 특히 가정이라는 코이노니아의 교제에 깊은 울림을 주는 인물이다.
특히 셜리가 토니의 아내 돌로레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도와주는 장면은 인상 깊다. 투박하고 거칠기만 했던 토니의 말투는 셜리의 손길을 거치며 로맨틱하고 고상한 문장으로 바뀌고, 그 편지는 멀어졌던 마음을 다시 잇는 다리가 된다. 셜리는 단순히 글을 써준 것이 아니라 토니의 가정에 온기를 불어넣고, 사랑을 더 강하게 흐르게 만든 것이다.
아마도 토니가 셜리를 단순히 ‘존중’하는 것을 넘어,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토니는 셜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부러움은 상대가 가진 것을 내가 갖게 되면 사라지는 감정이다. 그러나 존경은 다르다. 존경은 그 사람을 닮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토니는 셜리의 교양, 깊이 있는 내면, 타인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보며 그를 닮고 싶어 한다. 둘 사이에 오갔던 모든 것들은 결국 코이노니아의 상호성, 주고받는 사랑과 성장으로 이어진다.
해독되기 시작하는 셜리의 교만
여행이 계속되면서 셜리와 토니는 점점 더 가까워진다. 초반에 혼자 외롭게 위스키를 마시던 셜리는 어느새 토니와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서로의 옛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오해를 풀며 웃음을 주고받는 사이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를 넘어 진정한 우정과 유대로 발전한다. 그 과정 속에서 셜리의 매너와 품위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여전히 단정하고 고상하지만, 이제는 그 안에 따뜻한 온기도 깃들어 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던 그의 태도는 서서히 누그러지고, 마침내 셜리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의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토니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남부로 이동하던 중, 토니와 셜리는 경찰의 검문에 걸린다. 그들이 지나고 있던 지역은 흑인의 야간 통행이 금지된 곳이었다. 경찰관은 토니의 이탈리아식 이름과 억양을 조롱하며 무례하게 구는 데 그치지 않고, 이내 셜리에게도 차별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에 분노한 토니는 결국 참지 못하고 경찰에게 주먹을 날린다. 흥미로운 점은 앞서 셜리가 동성애적 문제로 구속되었을 때, 토니는 감정을 절제한 채 뇌물을 건네며 상황을 유연하게 넘겼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경찰의 조롱과 무시에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없을 만큼 분노한 것이다. 이 장면은 토니가 단순히 직업적 의무를 넘어서, 셜리를 ‘함께 싸워야 할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결국 그들은 함께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현실이 드러난다.
폭행을 한 것은 토니였지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셜리 역시 구금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흑인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죄인’으로 취급될 수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자, 셜리가 마주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을 다시금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셜리의 울분
구금된 두 사람은 셜리의 전화 한 통, 즉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바비 케네디에게 도움을 요청해 곧바로 풀려난다. 아무 생각 없는 토니는 이 상황이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하지만 셜리는 매우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과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풀려났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오히려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안겨준 것이다. 셜리는 참아왔던 감정을 드러낸다.
“난 평생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적인 말을 참아왔는데, 당신은 그저 ‘흑인’이라 불린 것 하나에 그렇게 분노했냐”며 토니의 이중적인 태도를 강하게 지적한다. 그러자 토니도 격해져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다.
“겉만 흑인이지, 정작 흑인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당신보다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내가 더 흑인에 가깝겠다!” 이 말은 셜리의 마음을 깊이 찌른다. 그동안 절제된 품위 있는 어조로 일관해온 셜리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울분을 터뜨린다.
“난 백인 부자들이 문화적인 척할 수 있게 그들에게 돈 받고 피아노를 쳐.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난 그들에게 그냥 ‘검둥이’야. 그게 그들의 진짜 문화야. 그리고 그 고통을 난 혼자 짊어지고 살아. 내 동포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지 못해. 그들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그러면 내가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고, 남자답지도 않다면… 도대체 난 뭐란 말이야?”
이 장면은 셜리의 내면이 가장 강렬하게 폭발하는 순간이다. 백치의 입폴리트 자살소동과도 오버랩된다.
그의 고상한 태도 뒤에 감춰져 있던 고독과 분열, 정체성의 혼란이 처음으로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마허샬라 알리의 연기는 단연 빛난다. 영화 내내 차분하고 단정했던 그의 말투가, 이 순간만큼은 흑인 악센트를 띠며 감정의 진폭을 극대화한다. 그 억눌렸던 고통이, 억양과 표정, 눈빛에 응축돼 폭발하는 순간은 관객의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든다.
그들의 화해
물론,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깊게 쌓아온 유대감이 있었기에 그들의 관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 장면은 단지 갈등 이후의 화해가 아니라 셜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전까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세우고, 품위와 교양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입었던 셜리였지만, 이제 그는 교만이라는 방해물 없이 진심 어린 관계 속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셜리는 다시 한번 토니의 편지를 봐주겠다고 한다. 그 행위는 단순한 도움을 넘어 마음을 여는 행위, 즉 코이노니아의 자발적 실천이다. 자신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단절을 선택했던 과거의 셜리와는 달리, 지금의 셜리는 관계를 향해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했다. 이에 토니도 마음을 열어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한 번 더 동생에게 연락해 보라”며 셜리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이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세상에는 먼저 다가가는 걸 두려워해서 외로운 사람이 참 많아.”
이 말은 셜리를 향한 것이자, 동시에 관계의 본질에 대한 조용한 깨우침을 주는 말이기도 하다. 셜리는 누구보다 먼저 다가갈 준비를 해왔고, 그 노력을 통해 마침내 ‘혼자가 아닌 사람’으로 서기 시작한다.
지긋지긋한 차별
마지막 투어에서 셜리는 무대 위에서는 환영받지만 정작 식당 안에서 식사할 권리는 없다. 그는 다시 한번 조용하지만 단호한, 품위 있는 분노로 거절당하고 외면당한다. 이 장면은 셜리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 당시 사회의 모순과 위선을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작중 셜리를 차별하는 이들은 겉으로는 품위와 교양을 갖춘 듯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교양은 진짜 품위가 아닌, 교만으로 변질된 허울뿐인 권위다. 그들은 티끌만 한 교만조차 경계하던 셜리와는 달리, 교만에 잠식된 채 주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배제와 차별을 정당화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셜리는 그들보다 훨씬 더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품위는 언제나 문 앞에서 거절당한다. 그가 아무리 고상하게 말하고, 뛰어난 연주를 들려줘도, 그들이 보는 것은 여전히 그의 피부색일 뿐이다.
사도행전 2장
사도행전 2장은 누구든 필요로 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다. 그 장면 속에는 물질만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존중과 사랑, 함께함의 기쁨이 담겨 있다.
토니와 셜리 역시 자유로운 자들이었고, 동시에 무엇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외부의 차별과 조롱 앞에서 폭력으로 맞설 수도, 분노로 대꾸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그런 방식의 가치를 따르지 않기로 선택한다. 토니의 참여, 교통, 친밀함, 그리고 셜리의 화해, 용서, 품격이 조용히 하나로 섞이며, 둘 사이에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피어오른다.
그들은 사도들이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던 것처럼, 치킨을 뜯으며 웃고,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찬미한다. 그들의 삶은 이제 단순한 동행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הָיָה)를 향한 찬양이며, 두 영혼이 만나 따뜻한 공동체로 변화해 가는 순간의 증거다.
오직 스타인웨이 피아노로만 연주하던 셜리는, 클럽 무대 위 낡은 피아노 앞에 선다. 피아노 위에 놓여 있던 브랜디 잔을 조용히 내려놓고는, 아무 말 없이 건반 위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그는 Winter Winds (겨울바람)을 완벽하게 연주한다. 비좁고 소란스러운 클럽. 그곳엔 고상한 무대도, 정숙한 청중도 없었지만, 진짜 음악과 진짜 사람이 있었다. 재즈 퍼커션들이 자연스럽게 잼에 동참하고, 리듬이 살아나며 공간 전체가 하나의 생동하는 몸이 된다. 사람들은 손뼉 치고 웃으며 무대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 춤추기 시작하고 토니는 그 열기 한가운데에서 진정한 자유를 연주하는 셜리의 모습에 파안대소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아름다운 결말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뉴욕에 도착하기 위해, 폭설 속을 뚫고 차를 달리는 셜리와 토니는 매서운 겨울밤 또다시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는다. 이전 상황과 같이 백인 경관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늦은 밤에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라며 손전등으로 차 안을 비추고, 토니와 셜리를 번갈아 비춘다. 굳은 표정으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라고 묻는 셜리에게 경관은 짧고 단호하게 “당연히 있죠”라고 대답하며 긴장감을 높인다. 그러나 이내 경관은 의외의 사실을 알려준다. 차량 뒷바퀴에 펑크가 나서 위험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단순한 단속이 아니라 사고를 막기 위한 진심 어린 조치였던 셈이다. 경찰관은 오히려 친절한 말투로 둘을 “신사분들”이라 부르며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까지 남기고 떠난다. 이 작은 친절은, 차별과 경계 속에 지쳐있던 둘에게 마치 예기치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따뜻하게 다가온다.
가장의 귀환
며칠 밤낮을 운전하며 거의 좀비 상태가 된 토니는 결국 돌로레스와 약속했던 성탄절 전에 집에 도착하는 것을 포기하고, 숙소에 묵자고 한다. 그러자 셜리는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토니를 뒷좌석에 재운다. 차가운 눈길을 가로지르며 밤새 직접 운전해, 결국 뉴욕에 도착한다. 심지어 토니가 약속대로 자신을 카네기 홀에 데려다줘야 하는 날이었지만 셜리는 오히려 그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스스로 운전해 카네기 홀로 돌아간다. 이제 셜리와 토니는 상하관계가 아닌 옆을 지키는 존재들의 연대가 된 것이다.
완성이자 시작의 코이노니아
토니의 집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친지들과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잔치상을 차린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음식 냄새가 가득한 그 공간은 따뜻한 공동체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 앞에서 토니는 셜리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하지만 셜리는 짧게 웃으며 정중히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평소처럼 아미트에게 시중을 들게 하지 않고, “당신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며 따뜻한 배려를 건넨다. 이에 아미트도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윽고 혼자 남은 셜리는 텅 빈, 그러나 고요하게 아름다운 자신의 공간 안에서 커다랗고 웅장한 왕좌 같은 의자를 바라본다. 그 의자 앞에 멈춰 선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다. 그 자리는 그가 지금껏 스스로에게 부여한 ‘위엄’의 상징이었지만 이 순간엔 어쩐지 고독함의 형상처럼 다가온다.
한편 토니의 집 안은 크리스마스 파티로 한껏 들떠 있다. 모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웃음소리와 음식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 토니의 시계를 전당 잡았던 전당포 주인 찰리와 그의 아내도 함께한다. 사연은 이렇다.
토니의 처남 조니가 전당포에 들러 토니의 시계를 되찾아주는 과정에서 찰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한번 들르시죠”라며 가볍게 던졌던 말이 실제 초청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작 조니는 찰리 부부가 정말 나타나자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제가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 오셨네요?” 물론 그 말은 농담이었고, 조니는 이내 찰리 부부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자리를 내어준다.
이 장면은 토니 가족 특유의 허물없고 따뜻한 분위기, 그리고 상대가 누구든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공동체의 포용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토니가 기다리던 셜리도 크리스마스 저녁에 모습을 드러낸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선 셜리에게 영화 초반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던 가족들도 이제는 토니의 진심을 읽은 듯, 아무 망설임 없이 그의 자리를 내어주고 따뜻하게 맞이한다. 그 순간, 셜리는 단지 손님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더 이상 스스로 쌓았던 교만의 벽 안에 갇혀 있지 않다. 티끌 같았던 교만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코이노니아의 식탁에 참여한다. 이제 토니에게서도 더는 인종차별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누군가의 피부색이 아닌 존재(הָיָה) 그 자체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두 사람의 여정은, 차별과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이자 진정한 인간관계의 회복, 사랑과 연대의 완성으로 끝을 맺는다.
코이노니아, 목숨을 바친다는 것
영화 초반, 셜리가 토니에게 면접 합격 전화를 걸었을 때, 토니와 돌로레스의 침대 머리맡에는 조용히 놓인 성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상징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돌로레스라는 인물의 믿음과 영적 중심을 드러내는 사인이다. 나는 돌로레스야말로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사랑과 환대의 태도, 남편의 변화에 대한 인내와 지지, 편지를 통해 셜리와 교감하는 따뜻함을 통해 영화 전체를 감싸는 보이지 않는 영적 축이 된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사랑은 셜리에게도 전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토니와 셜리의 포옹으로 끝나지 않는다. 돌로레스와 셜리의 따뜻한 포옹으로 마무리된다. 이 장면은 마치 초대교회 공동체가 서로의 손을 잡고 한 떡을 떼며 참여하던 그 순간을 연상시킨다.
친교의 코이노니아를 넘어서
토니와 셜리의 코이노니아는 결국 단순한 우정이나 연민을 넘어, 공동체에 대한 참여의 가치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코이노니아를 이해하고 살아낸다는 것은, 단지 누군가와 친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
고린도전서 1:9 KRV
성경에서 말하는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교제나 사귐이 아니다. 그것은 목숨을 내어주는 삶의 참여이며, 내 삶 전체를 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이다.
우리가 목숨을 내어준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지는 소중한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에겐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우리는 토니처럼 살 수도 있고, 셜리처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할 때, 다른 방식은 필연적으로 포기되어야 한다.
코이노니아란, 그 모든 선택지를 기꺼이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기로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고통과 부정, 배신, 차별, 지배와 같은 악의 충돌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겠다는 용기이며, 그 충돌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살아내겠다는 결단이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
고린도전서 10:16-17 KRV
코이노니아는 복음 앞에서 내 욕망을 내려놓고,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며, 생명의 양식을 함께 나누고 구하는 삶이다. 그 삶은 영화 속 작은 식탁에서, 치킨을 나누던 그 순간처럼 시작된다.
참고문헌:
순전한 기독교, C.S 루이스, 홍성사, 정경철 이종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