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존재의 자리를 갖지 못하는 이들.

by ENEAS
본 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Идиот, Idiot)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 작품을 읽고 글을 읽는 것을 권장.


입폴리트의 자살 소동.

입폴리트 체렌치예프. 그는 말기 폐결핵 환자이자 병자, 18세의 나이에 이 세상에 삶을 거부당한 인간이다.

꿈을 펼치고 나아 갈 나이에 죽어야만 하는 그가 대지를 모욕하고 세상을 등지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자연의 낙태아인 그는 세상을 증오하고 이 증오는 오만을 낳아 자신을 둘러싸는 커다란 장벽이 된다.

작품 속 그가 외벽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에 대한 메타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권총 자살에 대한 연극을 꾸민 것도. 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자신의 생을 끊으려 한 것도 모두 이러한 자연, 정해진 운명, 자신을 감싸는 증오에 대한 시위이며 반항이었던 것이다.


그의 자살 소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모두 그를 비웃는다. 입폴리트는 자신의 존재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더더욱 상기하게 됐을 것이다.


숭고하고 영웅적인 죽음을 "선택"하고자 했던 입폴리트는 절망을 맛본다.


[백치]에서 자주 언급되는 그림인 홀바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는 그의 상황을 대표하는 그림이자 백치라는 작품 전체를 대표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시신을 그려놓은 이 그림은 일말의 희망(구원, 부활)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에는 완전히 생명력을 잃은 인간이 그 신체의 크기와 딱 맞는 정도의 공간만을 허락받은 채 누워 있다.


입폴리트도 "존재의 자리"를 허락받지 못하고 오직 숨만 쉴 수 있는 최소한의 자리만 허락받은 인간으로 그림과 동일시된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백치의 주인공이자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인간 레프 니콜라예비치 므이쉬킨 공작과도 연관이 있다.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Hans Holbein the Younger



므이쉬킨 공작의 간질발작

도스토예프스키의 놀라운 묘사 능력.

우수와 정신적 암흑과 압박감 사이로 마치 그의 뇌가 갑자기 불꽃을 튀기듯 활발히 활동을 개시하고 그의 모든 생명력이 일시에 무섭게 분출하면서 팽팽히 긴장하는 듯한 순간이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가 번개처럼 짧게 지속되는 이 순간순간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자기 감각과 자기의식은 열 배 가까이 커지곤 했다. 이성과 감성이 더없이 환한 빛으로 밝혀지고, 그의 온갖 흥분, 의혹, 불안이 한꺼번에 진정되어, 밝고 조화로운 환희와 희망, 지혜와 궁극원인으로 충만한 그 어떤 최고의 평온경 속에 용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과 이 찬란한 광휘는 발작 자체가 시작되는 그 마지막 일 초(절대로 일초를 넘기지 않는다)의 예감일 뿐이었다.
백치 1권 407p 문학동네


므이쉬킨 공작 역시 백치로써 실존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의 자리를 갖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므이쉬킨의 지능은 초등학교 저학년의 수준이었고. 스위스에서 치료를 받던 때에는 완전한 백치로 세상과 고립된 존재였다. 그는 스위스에서 치료받고 러시아로 돌아오며 그의 특별한 자질을 통해 사람들과 가까워지게 된다.


그의 자질은 항상 진실된 인간, 편견 없고 권모술수적이지 않은 지극히 진지하고 진중한 진실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진실된 인간을 좋아하고, 그런 자와 대화하길 욕망하기에 므이쉬킨 공작과 가까워진다.


공작이 러시아에서 만나는 이들 호감을 가지고 존중의 태도로 그를 대해주는 이들을 통해 므이쉬킨 공작은 본인이 실존을 부여받은 인간, 즉 존재할 자리를 찾을 수 있는 희망을 갖는다.


이 희망은 희열과 환상, 환의로 이어지는데 이는 아글라야와의 약혼에 대한 야회에서 극에 달한다.


그는 자신의 백치스러운 모습을 이해해 주고 본인의 말을 듣기 위해 하던 말을 멈추는 노신사의 모습과 다른 사교계 인사들의 대우에 너무나 큰 기쁨을 느낀다. 이 기쁨은 배려에 대한 단순한 기쁨이 아닌 자신이 실존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희망의 기쁨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므이쉬킨처럼 진실되게 행동하고, 가면을 쓰지 않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가면을 잘 쓰는 자들이며, 상냥하고 겸손한 태도로 므이쉬킨을 맞아주지만 그 모든 것은 사교계의 기본적인 관례이자 이러한 이면과 속사정을 백치인 므이쉬킨과 같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데에 탁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야회에서 "아름다운 감정이 북받쳐올라" 목이 메고 환희에 차서 이야기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환희 트이는 듯하고 광명과 환희가 솟구쳐올라 발작하는 것은 이러한 기쁨의 정점이다.


하지만 그가 발작을 일으킨 후 야회의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어지고, 다음 날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를 앞세워 다른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변화는 그의 희망을 단칼에 그어버린다. 하지만 므이쉬킨은 그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의 "존재의 자리"에 대한 희망은 이후 로고진이 나스타샤 필립포브나를 살해 하며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공작은 다시 완전한 백치로 돌아가 영원한 이방인이자, 입폴리트와 같은 "실존할 자리가 없는"자가 된다. 백치로 돌아가는 이 장면에 대한 묘사는 충격적이고 비극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후빈다.


입폴리트가 권총자살 소동을 벌였을 때 모두가 비웃었지만 공작은 그러지 못했다. 본인도 "존재의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서 므이쉬킨은 그리스도의 표상이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 최고의 도덕적 힘을 지닌 인간으로 지능이 높거나 영리하진 않지만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파악하는 순수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는 모든 이들을 "어린아이"와 같이 보며 죄 없는 인간의 연민의 정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나스타샤 필립포브나를 죽인 로고진에게도 분노의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공작에게 호감을 보이던 이들은 공작과 대화를 할 때면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죄 없고 솔직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이며 일상으로 돌아가면 본래의 어른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결국 영원한 어른이 되었고 공작은 영원한 백치가 되었다.


위에서 봤던 홀바인의 그림은 이렇게 므이쉬킨 공작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희망적인 인물로 비극을, 비극적 상황을 통해 희망을.


[백치]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갖는다. 로고진은 15년간의 유형을, 나스타시야는 죽음을, 아글라야는 유럽식 기만을, 특히 므이쉬킨과 입폴리트는 끝내 존재의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은 독자로 하여금 굉장한 여운을 가지게 한다.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웠던 므이쉬킨 공작은 작품이 진행되며 당시 러시아뿐만이 아닌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부여하지만 결말을 맞으며 그러한 희망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는 비극을 보게 된다. 실제로 작품을 읽으며 희망을 가지고 므이쉬킨의 인간다움에 매료되지만 동시에 그를 왜 백치라고 부르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작과의 대화를 통해 어린아이로 돌아갔던 인물들처럼 [백치]를 읽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는 허무함을 느껴야 할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므이쉬킨 공작을 존경하고 따랐던 콜랴와 베라를 통해 희망을 말한다.

므이쉬킨과 그를 둘러싼 여러 사건들이 이어질 동안 그의 진정한 두 친구들은 그의 비극적 최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그의 의지를 따르며 살 것이라는 희망적 결말을 갖는다.


우리는 언제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이방인이 될 때 콜라나 베라와 같이 므이쉬킨의 의지를 이으며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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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김연경의문학창고 [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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