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성경
본 글은 쇼생크 탈출(1994)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쇼생크 탈출의 원제가 쇼생크 구원(SHAWSHANK REDEMPTION)이라는 것은 이 영화의 팬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영화의 제목 의역에 따른 문제는 "구원"의 키워드를 놓치고 "탈출"에 집중하므로 단순 탈옥 영화로 이 영화를 기억하는 것이다.
영화는 성경 구절과 등장인물들을 이용해 자유라는 결론을 도출해 나간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유,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투쟁. 이 모든 것을 드러내며 영화는 우리에게 잔잔하게 다가온다.
성경(THE HOLY BIBLE)
교도소장이자 교도소의 신처럼 군림하는 노튼의 두 가지 믿음은 규율(DICIPLNE)과 성경(BIBLE)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영화에는 노튼과 앤디가 성경 구절을 읊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을 단순히 성경의 내용을 모두 꾀고 있는 노튼을 위한 장면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노튼은 요한복음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를 앤디는 마가복음 13장 35절의 첫 부분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를 읊는다.
이 장면에서 앤디는 앞부분을 강조한다. "깨어 있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만큼 앤디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영화의 맥락에 있어서는 가장 정확한 해설이자 영화가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담긴 장면이다.
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또 다른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과 복음에 관한 이야기다.
율법과 복음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성경에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종이라 하고 복음 아래에 있는 자들을 아들이라고 한다.
율법은 행동에 대한 제한이자 방식이다. 작중에 해들리 교관은 말한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민법과 형법을 합친 600개의 법과 같다. -해라, -하지 마라 등등.
다시 노튼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 돌아가 보자.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노튼은 복음의 말을 이용하여 율법으로 해석한다. 자신의 법을 따르는 이들은 평화가, 아닌 이들은 해들리 교관의 폭행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권위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공포를 두려워해서, 악마를 두려워해서 율법을 지키는 자는 종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를 이용하는 자도 마찬가지이며 이에 종속된 사회는 종의 사회다. 즉 율법을 강요하는 노튼 이를 고분고분 따르는 모든 죄수. 쇼생크는 종들의 종속적 사회이다.
쇼생크에서 노튼은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하지만 결코 동일 시 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성경구절을 모두 꾀고 있던 그는 정작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그의 최후는 이에 대한 확실한 대가이다.
자신을 신이라 칭하던 노튼은 본인의 검은돈과 권력이 무너지는 순간 권총 자살을 하며 예수가 아닌 유다였음을 관객들에게 알린다. 실제 그의 최후는 유다와 닮아있다.
그렇다면 복음은 어떤 것일까?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에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갈라디아 서 3장 23~29절-
즉 복음은 율법 아래에 있는 종속된 이가 아닌 자유로운 자이자 독립적인 자이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앤디와 브룩의 까마귀 제이크가 있다. 브룩과 제이크에 관해서는 추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앤디를 보자.
앤디는 자유로운 자이다. 자유로운 자는 율법에 굴하지 않는다. 노튼이 쇼생크 안에서 많은 권한을 주었음에도 탈출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에서 표현한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 비종교인이라면 자신에 대해 깨닫는 것, 자유에 대해 아는 것, 독립적인 것이 복음을 따르는 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가르치는 이가 아닌 행하는 자였다. 앤디도 그와 같이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행동한다. 돌을 깎아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기도, 죄수들에게 맥주를 먹을 수 있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의 자유를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자신을 신이라 칭했지만, 종이었던 노튼과 비교되게 앤디는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한 점이 많다. 희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행동했던 것이다. 앤디의 이런 행동은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작중 죄수들 뿐만이 아닌 영화를 보는 관객인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준다.
이쯤에서 노튼의 믿음, 규율(율법)과 성경이라는 말이 왜 모순인지, 왜 자유와 성경이 되어야 하는지 알게 됐을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된 인물이지만 현실은 그를 따르는 우리의 이야기가 이어지듯이,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앤디가 아닌 레드다. 앤디의 영화 초반과 후반은 다르지 않다. 그는 계속해서 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고 처음부터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레드는 종이 었다가 아들이 되는, 달리 말해 종속적 인물이었다가 독립적인 인물이 되는 우리가 유심히 지켜봐야 할 인물이다.
또한 영화에는 레드의 성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계속해서 말해왔던 브룩이다.
“그리스도께서 오기 전까지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가 이롭게 되도록”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부모 아래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를 때까지의 이야기다. 즉,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율법에 갇혀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브룩이 이에 속한다. 이는 날 수 있음에도 날아가지 못하는 제이크를 보면 알 수 있다. 브룩은 까마귀 제이크가 날 수 있을 때까지 키운다고 하지만 성체가 될 때까지 보내주지 않는다. 그러다 가석방에 의해 브룩이 제이크를 놓아주었을 때 제이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오른다.
하지만 브룩은 자유에 의해 질식하는 인물이다. 50년을 감옥에서 지내온 브룩은 노튼의 대표적인 종이라고 할 수 있다. 50년을 쇼생크에서 길들여진 그는 더 이상 날개를 피지 못한다. 그의 날개는 쇼생크가 아닌 본인이 때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날 수 있는 기회가 오자 다시 한번 날개를 거부한다.
쇼생크에서 웃음을 잃지 않던 브룩은 갑작스러운 자유에 의해 웃음을 잃어가고 그 무게에 질식해 간다. 나는 이를 단순히 영화 내의 브룩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자신의 날개를 떼어버린 채 브룩과 같이 자유에 짓눌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브룩이 자유에 짓눌리는 모습을 보고 에레이 프롬(Erich Fromm)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이야기하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자유의 과실”을 내던지고 나치의 파시즘, 전체주의의 열광했던 근대인들에 관한 내용과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언급하는 지하 생활자의 구절 “저들에게 낙원을 선물해 준다면 하루도 못 버티고 그 낙원을 때려 부술 것이다”와 같이 자유에 대한 두려움을 다룬 내용을 상기했다.
현대의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면 우리는 다시 우리를 구속할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직업이 될 수도 모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직업을 가지고 모임을 갖는다고 자유에서 도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고 사회의 흐름대로 길들여지기를 원하는 브룩과 같은 사람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계속해서 갈망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결국 가라앉는 것이다. 레드는 브룩과 같이 끊임없이 가라앉던 와중이었다. 브룩과 같이 늙어가는 레드였지만 앤디의 여러 행동들을 보고 희망의 하모니카를 분다. 종속적인 삶에서 퇴화해 버린 날개로 떨어져 다칠 각오를 하고 다시 한번 날아오른 것이다.
쇼생크는 1차원적으로 감옥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저들은 감옥에 갇혀있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옥 밖으로 나왔음에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있던 브룩과 같이 우리 중 누군가는 계속해서 종속의 감옥에, 영화 속이 아닌 현실의 쇼생크에 갇혀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간단한 방향을 제시한다. 앤디가 죄수들에게 자유를 선물해 주는 장면 “피가로의 결혼”을 들려주는 장면과 석양 밑에 앉아 자유를 만끽하는 죄수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장면 자체로도 위 두 장면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특히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이 깔리는 석양 아래의 휴식 장면은 두고두고 명장면이 될 것이다. 위 두 장면에서 유심히 봐야 할 것은 죄수들의 시선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눈을 하며 깊은 생각에 빠진다. 순간뿐이지만 자신을 인지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를 인지하며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쇼생크 구원(Shawshank redemption)은 우리에게 반짝이는 눈빛을, 반짝이는 눈빛은 자신을 인지하는 사색을, 사색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시금 자신의 갈망을 표출하는 것으로 끝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이에 관한 영감을 선물해 주는 영화이다. 종속적인 행동을 하며 기죽어 있는, 쇼생크에 갇힐 수 있는 우리를 깨우는 것, 자신에 대한 인지와 자신에 대한 갈망, 질문이 우리를 제이크와 같이, 앤디와 같이 그리고 레드와 같이 끝없이 푸르른 바다와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광야를 날아갈 수 있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