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완벽하지 않기에 더 사랑하는 것.

by ENEAS
본 글은 길버트 그레이프(1993)의 스포일러를 포함.

길버트 그레이프(조니 뎁)는 아이오와 주의 엔도라에서 살고 있는 24살의 청년이자 가장이다.

그는 목매달아 자살한 아버지, 집 나간 첫째 형을 대신해 200kg의 어머니, 34살의 실직한 노처녀 누나, 사춘기 여동생, 마지막으로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동생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부양한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이러한 책임감에 짓눌리는 길버트의 성장 과정을 담는다. 길버트는 계속해서 강요되는 책임을 지며 지쳐가던 도중 캠핑족 베키를 만나며 자신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무엇이 길버트를 갉아먹는가?

영화의 원제를 보면 길버트는 무엇인가에 갉아먹히고 있다. 무엇이 그를 갉아먹는 것일까?

폭식증 어머니, 지적장애 동생과 같은 불안정한 가족 구성원? 카버 부인과의 불륜? 오래되어 무너져가는 집?


무의식
무의식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무의식이 삶을 결정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한다. -칼 융-

영화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만큼은 디카프리오가 아닌 어니 그레이프 그 자체이다.

어니는 틈만 나면 높은 곳을 오른다. 마을 사람들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행동하고 보안관들은 계속된 어니의 장난에 불만을 표한다.

그리고 길버트는 늘 그렇듯이 그를 내려오게 한다. 그레이프 형제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진다. 이 장면 외에도 나무에 올라가는 어니, 가격표를 붙이며 사장의 한탄을 듣는 길버트, 친구들과 모여 시간 보내거나, 카버부인과 불륜을 저지르는 행동 등 모두 늘 그렇듯이. 당연하다는 듯이 행해지고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그렇기에 길버트는 새로움이 없는 이 동네에 대해 이야기하고 떠나고 싶어 하지만 가족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며 체념한다. 그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어 새로움을 추구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하지 않으려 한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비유를 지하실로 든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지하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길버트는 자신의 무의식을 피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길버트와 베키. 젊은 시절 조니 뎁은 전설이다.

그런 길버트를 변화시키는 것은 베키의 존재다.

많은 짐을 짊어지고 엔도라를 벗어나지 못하는 길버트와 달리 베키는 캠핑족으로 떠돌이 생활을 한다. 우연한 계기로 캠핑카가 고장 나 잠시 머무르게 된 베키는 길버트와 가까워지며 그를 변화시키는 존재이자 동시에 질문하는 존재다.

베키의 질문은 길버트가 무의식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넌 무슨 일이 하고 싶니?",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봐" 이런 베키의 질문에 길버트는 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대한 "의식"이 점화된다.


이때부터 길버트의 일상에는 변화가 생긴다. 당연시하던 삶이 아닌 새로운 삶, 예측가능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항상 어니가 목욕하는 것을 지켜봐 주던 어니 스스로 할 수 있다 생각하고 그를 두고 베키에게 간다. 하지만 베키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까지 어니는 욕조에서 떨면서 형을 기다린다.

항상 함께하던 카버 부인(Mary Steenburgen)과의 불륜 관계도 베키와의 관계에 의해 끝이 난다.

어니를 방치해 감옥에 투옥되고.

결정적으로 그를 폭행한다.


영화는 이렇듯 무의식을 의식하고 발을 때려는 순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이는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길버트도 이러한 일들 때문에 변화를 꺼려하고 나아가기를 멈추었을 것이다.

자신이 변화하지 못했던 이유를 다시금 직면한 길버트는 베키가 곧 있으면 엔도라를 떠난다는 사실까지 겹쳐 더더욱 혼란스러워한다. 그 와중에 어니는 "늘 그렇듯"이 사고를 친다 이런 이유들이 종합되어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을 폭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체념하고 안주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


어머니 보니 그레이프의 마지막 가르침.

길버트에게 질문으로 무의식을 의식하게 해 준 것이 베키라면 몸소 실천을 보여준 것은 엄마 보니의 역할이 크다.

남편의 자살 이후 트라우마와 충격으로 폭식증이 걸리고 집 밖을 나가지 않던 엄마는 어니가 경찰서에 잡혀가자 집을 나선다.

영화 초반 길버트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가 돼버린 엄마를 구경하러 온 철없는 아이들을 위해 그의 엄마를 엿보게 해 준다.

엄마를 놀림감으로 생각하는데에서 나타난 행동이다.

보니도 길버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에 갇혀 있던 인물이다. 같은 밥상에서의 밥 소파에서의 담배, 잠 하루하루가 같았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집에서 숨어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길버트의 실수로 어니가 구치소에 투옥되자 그녀는 결심하고 밖으로 나선다. 자신의 무의식을 직면하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직면하는 모성애는 존경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자신에 대한 혐오, 세상이 바라보는 시선과 같은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과 직면하는 그레이프 가족
그들을 짓밟으려는 시선들


"늘 그렇듯이" 그들은 세상의 놀림감이 되고, 시선을 받는다. 길버트가 그랬듯 무의식, 내면을 넘어 변화하고자 하는 자들을 세상은 가만 두지 않는다. 보니는 이를 직면하지만 넘어서지는 못한다.

하지만 길버트는 그녀를 보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


베키의 영향도 컸지만 보니의 역할 덕에 어니와 화해할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보니를 무시하던 길버트는 이후 엄마 앞에 무릎을 꿇어 보니를 드높인다. 더 이상 놀림감이 아닌 자랑스러운 어머니로 성장하는 보니와 상대방을 높일 줄 아는 남자로 성장하는 길버트다. 그리고 길버트는 다시 세상을 등진 어머니를 위해 베키를 소개해주며 다시금 존중을 표한다.


소파와 지하실 그리고 침대

영화에는 많은 공간적 비유가 있는데,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공간인 지하실 외에 어머니의 소파가 있다.

영화 초반 보니는 2층을 오르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소파를 고집한다. 무의식을 직면할 수 있지만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을 직면하고, 자신이 가족의 짐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바뀌려고 마음먹자 진정한 의식의 영역이자 내면인 2층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딸이 정리해 둔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영원한 잠에 든다.

죽은 엄마를 발견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가 일품이다.

길버트 가족은 끝으로 어머니의 시신과 집을 불태우며 자신들의 무의식을 직면한다. 길버트는 더 이상 무엇인가에 갉아먹히는 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직면하고 질문하고 답했다. 앞으로의 삶만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 어니에게 말한다. 어디에든 갈 수 있다고.

길버트 가족

가족은 완벽하기에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완벽하지 않기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관계이다.

길버트를 갉아먹는 것은 절대 가족이 아니다. 문제를 지하실에 덮어두며 바라보지 않는 것. 피하려고 하고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를 키우게 되고 우리 자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길버트 가족은 운명에 따라 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가족의 소중함과 의미를 찾고 세상의 시선과 잣대에 맞서 무의식을 의식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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