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여전히 내가 엄마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새벽 수유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애매한 시간에 깨어나 다시 잠 못 들고 폰으로 소설을 읽느라 몰입해버리면,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러다 문득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아기침대를 확인한다. 아기가 잘 있는지 확인하면서 한꺼번에 내가 처해있는 현실을 다시 지각하는 묘한 경험들. 여전히 낯선 나와 너, 우리 사이.
엄마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갖게 되면서 걱정과 두려움이 커졌다.
조리원에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늘 했다. 아래층에서 수유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마다 매번 같은 걱정에 빠져들었다. 겨우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짧은 시간 동안 "만약 불이 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상상을 했었다. 엘리베이터에는 화재, 지진 등의 비상사태시에는 승강기 대신 비상계단을 사용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 안내문이 촉매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내가 머문 산후조리원에는 계단이 남쪽과 북쪽에 두 개 있었는데, 내 방에서는 남쪽 계단이 가까웠다. 나는 상상했다. 일단 남쪽 계단으로 뛰어내려 간다. 계속 1층까지 뛰어내려 가서 탈출을 할까? 아니면, 한 층 아래에 있는 신생아실로 달려가서 내 새끼를 찾아야 할까?
나의 상상은 두 번째 질문에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화재 시 신생아실로 들어갔을 때, 비슷해 보이는 아기들 중에서 과연 내 새끼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침대에 붙어 있는 아기 정보를 읽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사람 얼굴을 잘 구분 못하는 내가, 정전과 연기로 가득한 그곳에서 내 새끼를 찾아 함께 탈출할 수 있을까? 만약, 운 좋게 직원분들이 아기를 먼저 데리고 대피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나 혼자 신생아실을 계속 헤맨다면? 혹은 내 아이라고 생각하고 안고 나왔는데 다른 엉뚱한 아기였다면? 용케 아기를 찾았는데, 다른 아기도 더 데리고 나와야 할 것인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와 두려움 때문에 나의 상상은 매번 여기서 막혔다. 그 당시 나는 너무나 서툴고 미숙했기에 아기를 안는 것조차 겁이 나고 부담스러웠다.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당황해서 아기를 떨어트리는 건 아닐는지 하는 걱정. 다른 아기도 구한다고 한 팔에 아기 한 명씩 과연 안으려다가 다치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내가 딴 아기를 구해서 나왔는데 그 아기 엄마가 혼자서 계속 신생아실을 헤매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그런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마다 망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우리집은 아파트 1층. 앞 베란다에서 전용 화단으로 이어진 계단까지 있어서 더 이상 재난 시 무사히 아기와 대피하는 방법을 망상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내 두려움은 계속되었다.
자다가 깜짝깜짝 놀라서 깨어나는 날들이 이어졌다. 꿈을 꾼 것도 아닌데도, 깜짝 놀라 일어나서, 어둠에 익숙해지지도 않은 눈으로 아기 침대를 확인하곤 했다. 아기가 잘 누워 있는지,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를 수시로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아이는 따뜻한 체온과 들썩이는 가슴과 배로 자신이 건재함을 알려주며 엄마를 달래주었다.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면 신생아를 차에 태우고 이동하는 일은 보통 권장되지 않는다. 나 역시 그 정도 상식은 있는 여자라고 스스로를 판단했었다. 그런데, 가을이 되고 날씨가 좋아지면서 내 안의 흑염룡이 꿈틀대기 시작하지 뭔가.
엄격한 야간 자율학습 등이 일상인 고교시절, 나는 여러모로 선생님들께 예외적인 대우를 받았다. 예를 들면, 야자 땡땡이. 다른 아이들이 환자처럼 보이기 위해 얼굴을 비벼 벌겋게 만들고 강제로 체온을 올리고, 온갖 핑계를 대면서 발급받는 외출증을 나는 선생님에게 가서 그냥 끊어 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시는 선생님께, 그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요.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내 얼굴을 한 번은 쳐다보셨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 바로 외출증을 끊어주었다. 사춘기 여고생의 예민한 감수성을 이해한 음악 교사의 예술적 감성 덕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제대로 도른 자"인 아이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랬던 나였기에, 미칠 것 같았던 폭우와 지난했던 장마가 끝난 뒤의 눈부신 햇살과 상쾌한 바람, 파란 하늘의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정말? 설마 불가피한 일이었을까? 그냥, 그렇게 핑계 대며 신생아를 데리고 하는 외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길을 나섰다. 이미 이 아이는 출생 이틀째부터 시경계를 넘나들며 차를 타고 다닌 경험자였으니 괜찮을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이왕 길을 나섰다면, 마음 편하게 즐겁고 재미있게 놀아야 하는데, 그래 놓고는 또 망상에 젖는다.
예전에 봤던 보도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온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사고가 났다. 부모와 4살 난 아기가 타고 있는 차량을 음주, 졸음운전하던 화물차가 뒤에서 들이받은 것이다. 차는 반파되었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엄마와 아기가 즉사했던 사건. 남편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아내가 아이를 안고 있었어요.
사고가 나는 순간
아내가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는지
아이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어요.
깨우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정말 잠든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는 안되지만 운전이라는 게 나만 잘한다고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만약에 내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나는 내 아이를 그 엄마처럼 감싸 안아 어떻게든 지키려고 할 수 있을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망상에 사로잡혀 내내 두려움에 떨어댔으니, 나들이가 즐거웠을리 만무하다.
나의 "기우"는 과거로 나를 소환하기도 했다.
일제가 731부대에서 자행했던 인체 실험 중 하나. 뜨거운 방에 엄마와 아기를 가두고 계속해서 바닥에 열을 가하는 실험. 그들이 원하고자 한 데이터는 엄마가 아기를 바닥에 두고 밟고 올라서는 데에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가였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화상으로 발이 흘러 녹아내리는 순간에도 엄마는 아기를 끝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곧 자신의 생명이 다할 것이고, 그 순간 아기의 생명도 함께 꺼질 것을 알면서도,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그 순간에도, 아기를 지키고자 했다고 한다.
모성애라는 것은 허구이고 신화라고 생각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발생되는 애착관계는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 애착으로 나는 네가 되고, 네가 나일 수 있는 그러한 관계. 아직 나와 우리 아기 사이에 그런 관계가 형성되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그 끈이 끈끈해질수록 나도 초보 엄마 티를 벗어나게 되겠지.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망상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 건강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꾸역꾸역 또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번엔 나의 망상이 아니다. 다른 어떤 엄마에게는 악몽보다도 더 지독한 현실인 이야기이다.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하는 아이를 코로나로부터 지키고자 밖에 두고 엄마 혼자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그 짧은 순간, 대낮 만취 운전자 때문에 쓰러진 전봇대가 6세 아이를 덮쳤다. 나는 이 시간 기사를 보면서 울었고 분노했다.
기사 아래에는 그런 댓글이 달려 있었다.
이 엄마는, 아기와 함께 가게 안에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아기를 안고 울다가
깨어나서는 꿈이라는 사실에 또 울기를 반복하는 나날을 보내겠지요.
스스로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밝힌 분의 댓글이었다. 내가 그 엄마였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강했다. 지켜야 할 큰 아이가 있었고, 분노해야 할 대상이 있었기에 그녀는 슬픔에 가라앉는 대신에 싸우기를 선택했다.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음주운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달라고 서명을 받으며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아기를 지키지 못한 못난 엄마"라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청원 요청글을 보면서 나는 또 울었다.
아기를 낳고 부모가 된 사람들은 모두들 힘닿는 데까지 잘 키우겠노라고, 열심히 기르겠노라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개인의 힘으로 지켜내기에 너무나 버거운 운명이 닥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릴 때 바라봤던 부모님의 등은 너무나 굳건하고 단단한 장벽이었는데, 막상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두렵고 또 두렵다. 내가 아기를 지켜낼 수 있는 시련은 어느 수준의 것인지 알 수가 없기에 더 두려웠다. 개인의 힘을 넘어선 시련으로부터 아이를 어떻게 해야만 지켜낼 수 있을까. 운명? 내게 허락된 운명은 과연 어떤 것일까.
잔혹한 현실은 도처에 있었다. <뇌사 12개월 남아, 석 달 간의 연명치료 끝에 장기기증>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 불의의 사고로 뇌사판정을 받은 (故) 서정민 군. 아기의 부모님은 "장기기증은 또 하나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며 장기기증을 결심했고, 다른 아기들에게 심장과 폐 등 주요 장기를 기증하고 하늘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뉴스를 보고 난 이후, 일주일 가량을 펑펑 울어댔던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불의의 사고를 경험한 젊은 부부가 대승적인 결정을 내렸구나, 하고 생각하며 기사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간에 서정민 군의 사진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겨우 12개월을 살았던 아기.
너무나 귀엽고 예쁜, 해맑은 아기의 눈빛과 미소를 사진으로 만나면서, 신문 기사라는 벽을 뚫고서 정민이라는 낯선 아기와 엄마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 후 샤워하다가도 울었고, 자다 깨서도 울었다. 자다 깨서 내 딸아이가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도 울고, 잠결에도 울고, 밥 먹다가도 울었던 것 같다. 아직도 내 품에 안을 수 있는 아기를 포기해야만 했던 정민이 엄마를 상상하면 눈물이 났다. 어떻게 내가 감히 그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이렇게 정민이를 보내주지만,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모두의 가슴에서 계속 살아가는 거야"라는 말로 남편이 그녀를 설득했다고 한다. 정민이 아빠의 말이 맞겠지만, 안으면 온기가 느껴지는 내 아이를 어떻게 포기할 수 있었을까. 장기기증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 따뜻한 체온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콩닥거리는 그 심장 소리를 두 번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3개월이라는 연명치료 기간 동안, 붉은 혈색이 감돌던 피부가 창백해지고, 포동포동 부드럽고 따뜻하던 얼굴과 팔다리가 앙상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저 사진 속의 해맑은 웃음과 눈빛으로 살아있는 정민이를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감히 그녀의 용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는 작은 인간이라서, 괜히 내 새끼를 끌어안고서 그 포동포동한 젖살과 피부로 전해지는 온기, 묵직한 무게를 느끼면서 그녀를 생각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일상을 살면서도 매 순간 두려움을 만나는 내가, 그녀가 보여준 용기를 배우면서 조금씩 단단해질 수 있기를,
엄마가 된다는 것은, 마음속의 두려움과 마주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