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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May 19. 2021

커튼

보여주고 싶은 게 많지만 아직은 숨겨놓고 싶은 게 더 많은 커튼은, 이른 아침부터 터져 나오는 햇살을 숨기느라 바쁘다. 바람이 눈치채기 전에 부스럭거리다가, 팔랑거리면서 살포시 햇살을 저며 놓고선, 행여 들킬세라 그저 뒷짐만 지고 있다. 남의 일인 양 거만하게 서서는, 미동도 않는다. 용케 바람도 재워 놓았다.


부라타 한 덩이를 올린 샐러드와, 속을 부드럽게 달래주는 밀크티 한 잔으로 이른 아침을 먹고서는 설거지도 미뤄둔 채 소파에 앉는다.

뭔가를 먹은 후니까 눕기보다는 우선은 앉기.

햇살 옆에서 잠시 멍하니, 젖어드는 포만감에 움직이기보다는 일단은 읽기부터! 어제 멈춘 그곳에서부터 다시 이어서 읽기.

그냥 햇살 바라기를 좀 하다가 느긋하게 읽기를 계속한다.

모처럼 읽기에 속도가 좀 붙는다 싶었는데 방정맞게 더 이상의 가속도는 없다. 책을 손에 든 지 채 반 시간도 되지 않아, 몸은 눕기를 시작하고 눈은 읽기를 멈췄다.

가닥 너머의 저쪽 공간까지도 희미하게 내다보이는 커튼을 한동안 더 응시해본다. 햇살이 희미하게 투과되어 테이블에 엷게 스며들며 잔 무늬를 만들어냈다.

그 햇살이 만들어 놓은 엷은 무늬가 어찌나 포근하고 안정감을 주는지 모른다.


예전엔 커튼을 해 달 때, 빛을 상당 부분 차단하는 원단의 커튼으로 해서, 그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살렸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더 이상 그런 기준으로 커튼을 고르지는 않는다.

그러는 것이 왠지 촌스럽고 요령 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희미하게나마 빛도 좀 수용하면 좋겠어서, 꼭 커튼 본연의 기능에만 의존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연유로 선택한 것이  레이스 커튼이다. 그것도 정교한 무늬로 수가 놓인!


철이 바뀌거나 이사를 하게 되면 필요에 따라 가구를 바꾸기도 하지만 손쉽게 분위기의 변화를 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패브릭인데, 그중에서도 커튼이 제일 만만하다.

한때는 동대문 원단시장까지 가서 원하는 원단을 직접  고르고, 공임을 주고 맡겨서 커튼을 완성하기도 했다. 원하는 디자인과 치수를 말하면, 얼마의 비용만으로도 완성된 커튼을 택배로 받아볼 수 있는 것이다. 원단값이나 공임이나 교통비를 따지자면 기성품을 사는 것과 별반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비용은 차치하고라도, 약간의 발품을 파는 재미(애쓴 나 자신을 위해 '발품을 파는 수고로움'이란 표현은 극구 사양한다.)도 있고,  내가 고른 원단을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최대의 장점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커튼을 바꾸는 일에 예전만큼의 시간과 공을 들이지도 않고, 인터넷에서 살펴보고 손쉽게 고른 레이스 커튼에 만족한다. 그렇다고 건성으로 대충 고른 것은 절대 아니다. '싼 게 비지떡'이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 나름 적당한 가격선으로 타협을 하고 색깔과 디자인도 신중하게 골랐다.

마치,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그 옛날의 호위병 같은 존재로 느껴질 때도 있다. 쨍한 한낮의 눈부신 햇살은 한가닥 걷어내 주고, 흐린 날 한껏 창을 열어두었을 때 느껴지는 선선한 바람도 한 자락 덜어내 주는 적당한 가림막이 되어준다. 햇살과 바람에게 대책 없이 당하고만 있지 않게!

그 작은 것 하나로도 위로가 된다고나 할까?


일상은 참 시시각각 눈부시다. 때론 뜨겁고, 때론 지루하리만치 한가롭고, 유머러스하고, 합당한 이유들이 있고, 그지없이 소박하고 막 그렇다.

얇은 레이스 커튼으로 스며들어 온 오늘의 햇살이, 오늘 내가 누워서 멍 때리기 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돼주었다. 그지없이 합당하고 지극히 위로가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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