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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May 10. 2021

#05. 03.

아카시아 꽃

햇살이 제법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오월이 되면 하늘도 짙푸르러 지고, 여린 잎들을 내놓던 나무들도 신록이 무르익어간다. 봄나물과 들풀이 온 땅을 뒤덮는 시간은 봄도 여름도 아니다. 개망초가 줄기를 한껏 늘려 자라기 시작하고 민들레 홀씨가 날리기 시작하며, 송홧가루가 날아들고, 살구와 두의 초록 열매들이 솜털에 싸여 부피를 늘려가는 시간이다.


아까시 나무!

유년시절엔 아카시아로 알고 있던 그 향긋한 꽃에 대해서만큼은 진정 밝은 기운의 동심이 느껴진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스승의 날에 즈음해서 학교 담장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하얀 아카시아 꽃을 잔뜩 따다가, 담임선생님께 뿌렸던 기억이 난다. 말하자면 스승의 날을 기념해서 같은 반 아이들과 함께 한 일종의 감사 이벤트였다. 향긋한 아카시아 꽃은 쌀 튀밥 같기도 하고, 팝콘 같기도 해서 손으로 후루룩 훑어서 입안에 넣고 날로 먹으면, 꽃 향기만큼이나 달보드레한 맛이 다.


35년여 전과 비교하면 같은 시기의 평균 온도가 1~2도 정도 높아진 것 같다.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의 개화 시기도 최소 1주일에서 길게는 10일 정도까지도 빨라졌다. 아카시아만 하더라도, 나뭇가지에 초록 잎이 나기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금세 활짝 피어있는 걸 보게 되깜짝깜짝 놀라면서도 사뭇 반갑다. 예전엔 스승의 날 즈음에 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5월 초가 되면 벌써 피어서 온통 향긋한 꽃향기로 주위를 물들인다.

해마다 꽃이 피는 시기가 되면, 한창 피어서 예쁠 때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진다. 지역에 따라 온도차가 있으니 일정하지는 않겠으나,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기준으로 해서 몇 월 며칠에 어떤 꽃이 피기 시작하는지 대강의 꽃 일기를 쓰고 싶어 지는 것이다.


출퇴근길에 버스로 지나치는 W호텔의 산자락을 따라 해마다 봄이면 벚꽃을 보고, 아카시아를 본다. 가을이 되면 똑같이 그 길 위에서 붉은 단풍과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본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5월의 첫 월요일 퇴근길에, 예의 그 W호텔을 지나면서 아카시아 꽃을 보게 된 것이다.  

벚꽃이나 은행나무처럼 아카시아는 가로수로 쓰이는 수종이 아니기 때문에 산자나 강가를 따라 자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카시아 나무에 대한 것은 사실 모르는 게 더 많지만, 유일하게 정확히 기억하는 것 하나는, 워낙에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력도 좋은 나무라 뿌리가 땅 속 200미터까지도 뻗는다는 사실이다. 

아주 오래전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200미터라는 에 적지 않게 놀랐던 기억이 다. 다만, 수직으로 200미터인지 수평으로 200미터인지는 모호하나, 그림으로 기억하기론 수직으로 뻗는 모양새였으니, 아마도 지구의 맨틀을 향해 아래로 아래로 그 뿌리 끝점을 늘려나갔을 법도 하다. 엄청난 기운으로 지구의 땅 속 깊숙이까지 자신의 존재를 확고하게 박고 서 있는 그 무시무시한 거물급 아카시아가 내뿜는 꽃송이는, 뿌리와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순박하다. 화려함이라고는 1도 없다. 그야말로 색깔로도 튀는 법이 없다.

산속에 무리 지어 피어있을 땐 멀리에서도 그 향기가 느껴지는데, 이게 또 여간 기분이 상쾌한 게 아니다. 산과 들에 피고 지는 꽃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카시아 꽃도 언제 피었나 싶게 피었다가, 지는 때를 모르게 지고 나면 아쉬움만 남는다. 지구가 지금의 위치에서 태양을 한 바퀴 더 돌고 같은 자리에 와서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한시성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도 어김없이 때를 알고 피어날 때면 그지없이 반갑고, 그때만큼은 열한 살의 초여름으로 순간 이동하게 된다. 그 시절엔 동네 어귀에도 있었고 학교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나무였는데 이젠 부러 산을 찾아야만 만날 수 있고, 그 향기를 오래 누려보지도 못하고 어느 순간 홀연하게 흘려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꽃을 따다 뿌렸던 기억 때문에 아카시아 꽃을 보면 어김없이 초등학교 4학년 때가 떠오른다. 그것도 따스한 봄 햇살이 뜨거운 공기로 갈아타는 5월의 중순께로 딱 순간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내 유년 시절의 아련한 기억의 시점보다도 한 열흘 빨리 피어난 아카시아 꽃과 '오월의 셋째 날' 서울의 동쪽 끝 한강변을 마주한 W호텔에서 선물처럼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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