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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Feb 10. 2022

진정한 세렌디피티

궁극의 공부방

성수동에 드러내 놓고 다니는 카페가 있다.

공장이 많던 시절의 2층 건물 그대로를 카페로 개조한 갤러리 카페이다.

버스를 타고, 전철로 갈아탄 뒤, 성수역에서부터 카페까지는 도보로 약 7, 8분!

집에서 나서기부터 카페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52분 23초 정도!

잘 짜인 여행 일정처럼, 버려지는 시간 없이 째깍째깍 당도한다고 쳐도 대략 46분 57초쯤 걸리는 거리이다. 카페 오픈 시간에 맞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집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가본 적도 있다. 택시를 불사할 정도로 그것이 그리 중요한 일이더냐고 묻는다면, 그러하오만.


맨 처음, 이 카페에 오게 된 계기는, 언제나 풍문으로만 듣던, ‘성수동 카페 거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초록 창에 검색해 보니, 첫머리 언저리에 딱 뜨는 카페이기도 했고, 이것저것 뒤져보니 분위기도 제법 괜찮았다. 직접 현장에서 느껴보는 분위기가 더 좋았다고 해야 맞겠다.

어느 집 마당 같은 분위기로 조성된 야외 테이블도 자연스러웠고,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던 듯한 포도나무가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담장 쪽 벽면으로는 중품 정도의 자작나무 대여섯 그루가 있고, 그 아래로 계절 꽃들이 싱그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1층과 2층의 실내에는 널찍한 테이블도 많고, 그림 액자와 사진으로 벽면이 채워져 있어서 마치 갤러리를 연상시킨다.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선 커피부터 한 잔 주문하는 것이, 이 카페에서의 나의 첫 루틴이다. 이곳의 아메리카노는 제법 맛있다. 맘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고, 뭔가 어른스러운 몸가짐을 하게 하는 힘을 가진 커피다.

2층의 실내 공간 말고도, 따로 분리되어 있는 안쪽 공간에도 대형 테이블이 두 군데 있고, 격자무늬의 커다란 통유리창이 있다.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만의 자리’가 있는 곳이다.

거기에서 바깥 데크로 연결된 문을 열고 나가면, 톰 소여의 오두막집처럼 생긴 나무집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그 작은 공간 안에는 여느 다락방처럼 조명을 비롯해서 어지간한 것들이 제법 갖춰져 있다.

3층으로 올라가면 마치 옥상의 텃밭처럼 화단이 작은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고, 온갖 꽃과 키 작은 나무들, 그리고 핑크뮬리와 같은 사초과(莎草科)의 이국적인 풀들이 심겨 있다. 1층 야외에도 있었던 똑같은 포도나무가 역시나 똑같이 탐스러운 열매를 매달고 있다.

초록 창에서 처음 알게 된 이 카페를 맨 처음엔 호기심으로 찾게 됐었고, 그다음은 친구와 함께였는데, ‘성수동 카페 거리’에 대해 풍문으로만 들었던 친구가, 이곳에 와보고 싶다고 해서 나의 추천으로 함께 걸음 하게 되었다.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2층 테이블에 앉아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다가, 음식을 시켜서 점심까지도 맛있게 먹고, 그 후로도 한동안 얘기를 이어나갔다.

3층 야외 테라스로 올라가서는 핑크뮬리 앞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서두가 장황하게 길어졌지만, 사실상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제부터다.

집에서부터 이곳까지 걸리는 시간이 46분이 어떻고, 자작나무가 어떻고 말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이후로 내가 이 카페를 자주 찾는 이유는 ‘공부’에 몰입하기 위해서다.

무거운 노트북을 챙겨 나와서 2층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때로는 리필을 하고), 몇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공부한다. 화장실도 딱 한 번 정도만 다녀오고, 그러다가 배가 고파지면 식사메뉴를 하나 시켜서 깨끗이 비운다.

이곳의 익숙한 분위기 때문일까? 그 뒤로 나는 이곳에서만큼은 공부가 정말 잘 된다고 믿게 되었다. 아무리 집에 혼자 있게 되더라도, 공부할 때는 이곳에서 하고 싶어 진다.

챙겨 나올 게 한둘이 아니고, 외출 준비만으로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리 서둘러도 46분 57초쯤이 걸리는 곳이지만, 그러한 발걸음도 마다하지 않고, 두말없이 이곳으로 나온다.

큰 테이블에 온갖 장비(?)들을 꺼내놓고 책을 펼치면 그때부터는 그냥 무조건 고도의 집중으로 이어진다.

그러라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으니까.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공부를 하면, 스펀지처럼 하나둘 필요한 것들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앉는다.


언젠가는 책상 위에 노트북과 책을 꺼내놓고 공부할 준비를 마친 다음에 얼마간 독서를 좀 해야겠다는 마음에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머리에 기름칠할 요량으로 가볍게 독서를 시작으로 공부할 생각에서였는데, 갑자기 한 분이 나에게 일행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혼자라고 했더니, 대뜸 여기 분위기가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린 사내아이까지 있는 젊은 엄마였는데, 아마도 이 안쪽 공간은 뭔가 싶어서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테라스가 있는 창가를 끼고 혼자 앉아서 조용히 독서를 하는 내 모습이 사진을 찍어주고 싶을 만큼 꽤 서정적으로 보였나 보다.

보통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는 게 일반적인데, 일부러 여러 장의 사진을 여러 각도로 찍어주는 적극성을 보여주셨다. 그럴 정도로 그 장소의 분위기는 차분하면서 꽤 서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름의 생각은 그렇다. 분위기로 보자면, 공부하는 분위기는 너무 조용해서도 안 되고, 너무 시끄러우면 곤란하고, 또 공간적인 면에서는 카운터에서 한눈에 손님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장소가 협소해도 안 된다. 적당히 시선이 분산되어서 내가 커피를 한 잔만 시켜 마시는지 리필까지 해서 마시는지, 또 파스타를 시켜서 혼자 먹는지 둘이 먹는지 모를 정도로 적당히 넓어야 한다.

철저하게 혼자서 사부작대며,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책상에 앉아서 편안하게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고립감과 고도의 몰입감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화장실과 주문 카운터도 1층에 있고, 음식과 음료 픽업도 모두 1층에서만 가능하지만, 층계참이 높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함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만큼 이곳의 모든 분위기가 다 편안하게 수용된다.

말랑말랑한 나무 향기,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바삭바삭한 웃음소리와 기름진 소곤거림이, 잘 버무려 놓은 섬초 나물처럼 달큼하게 느껴진다.

딱히 말을 억지로 꿰맞추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여기서 공부를 하면 집중이 잘되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 먹는 음식도 그렇지만 하는 공부까지도 맛있다. 그리고 시험을 치르게 되면 결과도 아주 만족스럽다. 그런 자연스러운 흐름이 당연한 귀결처럼 여겨진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그래서 이 카페가 주는 의미는 나에게 남다르다.

이처럼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장소는, 마음속에 보물 지도를 하나 가진 것처럼 든든함을 느끼게 한다. 나만 알고 있는 최적의 맛집을 찾아냈을 때, 혹은 별 대수롭지 않은 자신만의 루틴에서 뭔가 특별한 의미를 찾게 됐을 때처럼.

말하자면, 우연히 깨닫게 되는 일종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의도치 않게, 우연히 소중한 것을 발견할 때 갖는 즐거움)와 같은!

따먹지 않는 포도알은 스스럼없이 건포도가 되어가고


요즘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 중 한 사람이 이 카페에서 정책 발표를 하는 걸 우연히 뉴스에서 봤다.

후보들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민심을 두루 접하기 위해 전통시장이나, 기관을 찾는 것은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콕 찍어서 카페, 그것도 나의 최애 카페에서 수십 명의 기자와 취재진을 대동하고 회견을 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내가 뉴스를 너무 안 봤나?

어쨌거나 그 후보의 정책을 듣는 것은 뒷전이었고 배경으로 보이는 장소를 재차 확인하면서 ‘진짜 거기라고?’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신기하기도 하고, 그 장소가 뭔가 더 대중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긴 언젠가는 유명한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을 녹화하기도 했으니까, 이제 그곳은 더는 나만의 특별한 카페가 아닌 거지.

그래도 여전히 그곳은, 내 마음속에 있는 보물 지도가 틀림없으며, 나의 최애 카페이자 궁극의 몰입감을 주는 나만의 공부방이다.


앞으로도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해야 할 때는 어김없이 그곳을 가기 위해 무거운 노트북도 흔쾌히 들 것이며, 머리를 감고 화장하며 옷을 고르는 번거로움도 감내할 것이며, 나만의 최적의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시간이 애매하면 택시를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보물 지도라면 적어도 그 정도의 불편함은 기꺼운 것이므로. 그리고 그런 일들을 일부러 즐기면서 하다 보면 분명히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게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스스로 만족한 것 이상의 만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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