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world'를 등지고 'world'를 등에 업자!
시부모님은 내가 결혼할 때부터도 안 계셨다.
남편이 어렸을 때 두 분 모두 돌아가셨으니, 대부분의 며느리라면 당연히 계시는 시어머니 혹은 시아버지가, 내게는 실체가 없는 분들이다.
고부갈등이 있을 리 없고, 노여워하시는 시아버지의 불호령도 당연히 없다.
글쎄, 두 분 모두 계셨더라면 얼마나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됐었을지는 의문이다.
고백하자면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될 자신이 없다.
시부모님께 지극정성으로 잘해 드리는 며느리는, 모름지기 귀한 법이니까.
명절이면 큰 시누이댁으로 간다.
1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라서 오고 가는 길이 딱히 힘들지는 않다.
다만 명절 전후라면 도로가 좀 막히기도 하니 평소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보통은 명절 전날에 시누이댁으로 가서 함께 음식 준비를 한다.
비슷한 경우로는 김장할 때도 마찬가지로 시누이댁으로 가서 함께 김장을 하고 김치를 가지고 오는 식이다. 어쨌든 나는 손아래 올케이고, 큰 시누이는 나와 띠동갑으로 시댁의 다섯 남매 중 맏이시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어쩌면 내게는 시어머니와 같은 느낌의 시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생들에게 음식을 해먹이시는 게 이력이 나신 분이니, 원체 부지런하시고 통도 크시다.
일하시는 게 거칠 것이 없으시고 손이 빠르시니, 뭔가 할 일을 눈앞에 두고 잠시라도 쉬시는 법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큰 형님에 대한 이미지는, 언제나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시는 모습의 이미지가 강하다.
음식을 하실 때도, 밥을 차리실 때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엌을 진두지휘하시면서 거침없이 바쁘게 움직이신다. 그런 분이신데 목소리도 작을 리 없지. 쩌렁쩌렁하시다.
나는 어떤고 하니, 둔하지는 않지만 원체 작게 사부작사부작대면서 일하는 타입이라 빨리빨리가 좀 버거운 사람이다. 말소리도, 행동도 거침없기보다는 느긋하면서도 조용조용, 천천히가 몸에 익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는데, 큰 형님 앞에서는 종종 영 시원찮은 사람이 되곤 한다.
살림을 하셨어도 나보다는 십 수년을 더하셨고, 이날 이때까지 식구들을 건사하시느라 오롯이 혼자서 집안일을 거의 해오셨기 때문에 여지없이 아마도 주부 12단의 아우라가 나온다.
나는 뭐, 손이 야무진 주부 9단의 폼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주먹구구식으로는 하지 않는 살림 솜씨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만큼은 살림 잘하는 티는 안 낸다. 내봤자 티도 안 나니까.
음식도 제법 먹음직하게 한다는 소리깨나 들었지만, 여기서만큼은 뭔가 하나는 부족한 사람이 돼야 한다.
예를 들자면, 잡채를 하려고 갖은 야채들을 볶더라도 형님 기준에선 내가 야채를 너무 볶아버린다거나(내 기준에선 너무 적당한데), 간이 싱겁게 된다거나(결코 싱겁지는 않지만) 하는 식이다.
이게 뭔가 뒤통수에서 감시하는 레이더망이 하나 달린 것 마냥, 내 살림도 아닌 데다가 오랜만에 다녀가다 보면 뭔가 손에 붙지 않는 살림살이들과 집안 환경이 나로 하여금 그냥 패자의 기분이 들게 하고 만다.
뭐, 내 집이 아니니 그냥 형님이 볶으라는 대로 볶고, 넣으라는 것만 넣으면 됐지, 뭘 더 잘해보려고 용쓰는 것 자체가 하극상이 된다. 좀 설 익으면 어떻고, 그래서 설컹설컹 씹힌다고 한들 뭐 어쩌랴.
말씀도, 휘몰아치는 속사포 랩을 방불케 하는 하이톤이기 때문에, 혼나는 기분이 들게 된다.
잘하고서도 야단맞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은근히 할 말이 많았나 보다. 사설이 길어진다. 뭔 상관이람? 우리의 통 큰 시누이께서 이 대목만큼은 통 크게 모르시길 바랄 뿐이다. 아니면 남편의 입을 틀어막는 수밖에.
어쨌거나 명절 때건 김장 때건, 시누이 댁에 오는 건 그냥 긴장의 연속이고 마냥 편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음식을 먹어도 뭔가 후다닥 먹게 되는 것 같고, 한 번 뱃속으로 들어간 음식들 사정은 어떨지 모르지만, 화장실에서 볼일 한 번 속 시원히 보지 못하는 걸 보면, 그 녀석들도 속에서 어지간히 부대끼나 보다.
손아랫사람 입장에서 제 하고픈 대로 다 할 수 없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고, 뭐 누가 눈치 준다고 그깟 눈치를 보며 움츠러드냐고 할 수도 있겠다만, 워워. 그러지 마시라. 다 알면서 그러면 쓰나? 이럴 땐 그냥 약자의 편에 서시라! 시월드에서 편할 리 만무한 남의 사람 심정도 좀 헤아려주셔야지.
아무리 친언니처럼 올케를 대한다고 해도 엄연한 남인데 어디 친언니 같을라고.
시누이 노릇 안 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살가운 내 누이가 아니고 남편의 누이가 아니던가.
허물없이 지내는 막역한 동기간이라고 해도 꺼려지는 게 있고, 서로 가리게 되는 것도 있게 마련인데, 하물며 시월드 분들 아닌가? 다만, 미숙하나마 그래도 제 식구 감싸듯 서투른 올케일지라도 더 챙기고 감싸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그저 군소리하지 않고 감사한 줄은 알아야지.
1년에 몇 안 되는 기념일도 살뜰하게 챙겨드리고, 안부 인사도 한 번이라도 더 드리고, 시조카들에게도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한 번 더 건네면 되지. 영혼 없는 빈말이나 가식은 나하고는 안 맞는 것들이라 물론 억지로 하는 건 없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말과 행동이 자연스러운 법이니까.
몇 년 전부터는 명절이어도 차례상을 차리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에 연휴 한 두 주 전에 미리 선산에 다녀오고, 정작 명절에는 함께 모인 가족들끼리 먹을 만큼만 음식을 준비한다.
몸을 고되게 쓰는 일은 점점 버거워지고, 예전만큼 가족이 모이는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니, 명절이라고 해서 굳이 힘들게 음식을 장만하고, 북적거릴 일도 아니다.
언제라도 '모이자!'싶으면 얼굴 볼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살고 있으니, 주말이나 기념일마다 왕래할 수도 있다.
이제는 '명절'이라는 것의 고유한 의미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시댁 부모님이 계신 것도 아니다 보니, 형제자매들끼리 한 데 모이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결혼한 지 25년이 되었어도 시월드는 어쩔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인 탓에, 긴장감 속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면 몸은 두 배로 피곤해진다.
이제 또 몇 년 후면, 차례는 고사하고 가족들끼리 먹겠다고 그나마도 장만하던 명절 음식도 안 하게 되고, 모처럼의 연휴라고 가족들끼리 여행을 계획할지도 모른다.
이미 오래전부터 명절에 가족 여행을 떠나는 것은 더 이상 생경한 풍경이 아니다. 아마 나도 곧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답답한 도시의 시월드를 마다하고, 더 답답하고 복잡한 세상을 향해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