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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색시계 Jan 22. 2024

시간, 기억, 믿음의 삭제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고 살다 죽는다. 한 사람은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시간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시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살아갈 것이고 우리는 존재했는지도 모르게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모두 소멸할 수도 있고. 그렇기에 사실 삶에서 시간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는 해를 보고 아침이라 생각하든, 오늘이 저녁 7시이든 오전 7시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같은 맥락에서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인생의 연대기를 따라 일렬로 쌓여간다고 믿는다. 10년 전 내가 상대와 쌓아온 추억, 5년 전 내가 상대와 쌓아온 추억이 앞으로의 그 사람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만들어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존재하지 않듯 기억도 사실은 허상에 불과할 수 있다. “어제” 내가 포조와 럭키를 보았는가? 정말? 내가 포조와 럭키를 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기억한다면 나는 포조와 럭키를 본 것인가 보지 않은 것인가? 나의 기억이 그렇게 중요한가? “어제” 내가 소년으로부터 내일은 꼭 고도가 오리라는 말을 전달받았던가? 오늘 소년이 와서 나에게 내일은 고도가 꼭 오리라 말한다면? 내가 “어제도” 소년을 만났던 것을 기억한다면? 혹은 기억하지 못한다면? 혹은 소년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간의 개념이 삭제된다면 시간을 통해 쌓아 온다고 믿는 기억 또한 의미를 잃게 된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내일 고도가 오기를” 믿는가? “어제 포조와 대화를 나누었음을“ 믿는가? ”지금이 저녁 7시가 아니라 오전 7시임을“ 믿는가? 시간과 기억의 개념이 무의미해지며 믿음 역시 의미를 잃는다. 신과 같은 거대한 것들은 물론이고 이 신발이 나의 것이라는 사소한 믿음조차 의미를 잃는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시간, 기억, 믿음이 의미를 잃어버린다.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도, 기억도, 믿음도, 아무것도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한다.


포조 : (갑자기 사나워지며) 그 빌어먹을 시간이라는 것을 가지고 당신은 왜 나를 괴롭히는 것이요? 지긋지긋해! 언제! 언제냐구! 어느 날, 어느 날 벙어리가 되었다고 하면 충분하지 않소. 어느 날 나는 눈이 멀었고 어느 날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것이요.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것이요.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각에 말이요. (155쪽)



  그렇다면 고도를 왜 기다리는가? 필자는 오히려 모든 무의미 위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가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데, 고도를 기다리면 어떻고 또 기다리지 않으면 어떤가?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데, 고도를 기다려보면 어떤가? 뭐 어때? 이 모든 무의미 속에 갇혀 무의미하게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를 멍청한 행위로 바라볼지, 긍정적으로 바라볼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작품에서는 왜 하필 두 사람이 고도를 기다리는가? 한 명이서 기다릴 수도 있을 텐데. 작품에서 두 사람 간에 가끔씩 등장하는 단어는 ‘적적함’이다. 필자는 이 ‘적적함’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두 명이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이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우리의 삶도 생각도 모두 다 의미가 없더라도, 내가 행하는 그 모든 말과 행위, 시간과 기억과 믿음이 정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한들 오늘도 ‘나’는 적적함을 느낄 것이다. 아니, 이 세상에 발 딛고 있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그러니 이왕이면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 적적해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면 좋겠다.



블라디미르 : 모든 인류에게 호소하는 저 울음소리, 아직도 도와 달라는 소리가 우리 귀에 울리고 있어! 그러나 이 장소, 이 순간에 있어서는 모든 인류란 것이 결국 우리를 말하는 거야. 그것이 좋든 싫든 간에. 때를 놓치기 전에 우리 이것을 이용해 보세. 잔인한 운명으로 태어난 고약한 족속들을 한 번만이라도 어디 근사하게 대표해 보세. (...) 이 무서운 혼란 가운데서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네. 우리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137쪽)


  따라서 필자가 해석하기에 이 작품은 인간들에게 위로를 선사하려는 작품이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의미 없지, 그러나 그런 이 의미 없는 세상을 살아가며 너는 얼마나 적적함을 느끼고 있니. 너의 비극을 나도 알고 있다고 모질게 확인하고 해체하고 선언해 버려야만 선사할 수 있는 위로. 이 작품은 그런 위로를 담고 있다. 그렇기에 책을 덮고 나서는 잠시 가슴이 아리듯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괜찮다는 무책임한 말 따위는 던지지도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며 함께 무의미해질 뿐.




한 줄 평 : 무의미한 위로



사뮈엘 베게트, 홍복유 옮김,  <<고도를 기다리며>>, 문예출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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