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진왜란.
역사적으로 이미 많이 알려진 아는 이야기지만, 당시 살았던 누군가의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면, 미처 몰랐던 임진왜란의 뒷 이야기는 재미있는 소재가 된다.
서울역사편찬원에서 듣는 2025 상반기 서울역사 수업이 시작됐다.
이번 주제는 [역사 속 서울 사람들의 살아남기]이다.
그중 3회 차 수업이 바로 <임진왜란의 끝, 후유증을 딛고 일궈낸 일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전후 배경이나 전쟁 과정이 주된 이야기였다면 집중하지 못할 강의였겠지만, *선공감 감역이었던 *오희문이라는 사람이 쓴 전쟁의 경험과 피란 생활을 일기로 남긴 임진왜란 뒷 이야기였다.
*오희문의 <쇄미록>
1591년 11월부터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 동안 써 내려간 일기형식의 기록물
*선공감
조선시대 토목, 영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감역관은 종 9품 관직이다.
누구나 그렇듯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오희문의 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5개월 전인 1591년 11월, 오희문은 노비의 신공(신역 대신 내는 공물)을 걷고, 오랜만에 친척도 만나기 위해 전라남도로 여행을 갔다. 그는 여행 중이던 4월 16일에 전라도의 장수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본문 발췌)
(중략)
그가 전쟁 직후 전해 들은 서울의 상황은 피란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27일 이후로 도성문을 굳게 닫아 출입할 수 없다가 그믐날 첫새벽에 주상께서 종묘를 버리고 피란길에 오르고부터 왜적이 도성에 들어간 5월 3일까지 2, 3일 동안 도성의 모든 사람이 앞다퉈 성문을 빠져나가다가 서로 짓밟혀 죽기도 하고 혹은 앞뒤로 서로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쇄미록> 1592년 4월 19일 이후> (본문 발췌)
(중략)
전쟁이 발발하자 오희문은 피란길에 올라 산속에서 무려 86일을 지냈다. 그러던 중 가족들이 충청도의 예산에 피란하여 무사히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으로 길을 나서 홍주에서 극적으로 재회했다. 이후 그가 피란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완전히 돌아온 해는 1601년 2월 26일이었다. 1601년 1월 아들 오윤겸이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자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본문 발췌)
(중략)
1598년 12월 3일 강원도의 평강에서 지내던 오희문은 임진왜란이 끝난 상황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또 들으니, 청적(가토 기요마사)이 자신들의 소굴을 불태우고 모든 왜군이 바다를 건너가자 마제독이 그 소굴을 차지했고, 임금은 백관을 거느리고 군문(형개)에게 하례했다고 한다. 순천에서도 진유격(명나라 장수 진린 - 당시 그의 직책은 수군 도독이었으나, 오희문이 잘못 안 것으로 보임)이 우리 수군과 힘을 합해 싸워서 왜적을 크게 이기자 왜적이 도망쳐서 바다를 건너가 버렸다고 한다."(본문 발췌)
(중략)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다만 들으니, 이순신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나라의 불행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상서롭지 못하다."(본문 발췌)
(중략)
더 많은 뒷 이야기가 있지만, 여기서 마무리 해보면.
이렇듯 아는 이야기 속에 몰랐던 이야기가 더해져 '살아있는 역사'라는 말이 생각났고, 아이들에게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사람으로서 임진왜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 뜻깊은 강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