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부장의 부축을 받으며 연가의 신당에 들어온 선은 신기하게도 가슴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신당 안을 둘러보니 수묵화로 그려진 백호신의 그림이 가운데 걸려 있는데, 흑백의 그림 속 백호신의 눈빛은 마치 살아있는 신 처럼 보였다. 그리고 소박하게 꾸며진 제단과 향로의 향이 선에게 통증을 잊게 해주는 치료제 같았다.
마 부장 역시 신당에 처음 들어와 본 듯 신기하게 둘러보다가 선을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나리, 흉통은 나아지셨습니까? 의원 만나서 약이라도 지어 드시죠.”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니 약 먹을 정도는 아니네.”
마 부장은 연가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 눈치를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다행이구요. 그나저나 산 짐승을 제물로 바쳐서 제사를 지내는 무당집이 여긴가 봅니다. 제가 동물의 사체를 밟아서 우리도 저주에 걸리는 건 아니겠지요?”
선은 마 부장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제단 한쪽에 금줄로 묶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일어나 단지를 만져보려고 손을 뻗는데, 마침 연가가 놋그릇에 담긴 물을 들고 들어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흉통은 괜찮으신가요? 이 물을 좀 드세요.”
연가는 놋그릇을 선에게 건넸다. 놋그릇에 담긴 물을 마신 선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물줄기를 따라 가슴 통증도 씻겨 내려가는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소. 이렇게 절 도와주셨는데, 사실 물어볼 것이 있어 들리려던 참이었지요. 송구스럽지만 내일 포청으로 나와주시겠소? 근래 일어난 살인사건 관련 조사를 할 것이 있어 그렇소.”
“제가 흑주술을 부려 죽게 했다는 소문 때문인가요?”
“저희도 저주에 걸리는 건 아니겠지요?”
마 부장은 두려운 눈빛으로 말했고, 선은 눈짓으로 마 부장을 말렸다.
“그건 소문일 뿐이오. 다른 수상한 자를 이 근방에서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려는 것뿐이니 너무 기분 상해 마시오.”
연가는 선의 말에 신당 안 문갑 서랍에서 오방색 팔찌 하나를 꺼내왔다.
“이걸 종사관 나리께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이게 뭡니까?”
“오방색 팔찌입니다. 나리에게 필요한 부적이라고 해두죠.”
“제게 왜 이런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혹시 우리 나리께서 저주에 걸리셨습니까? 그것이 보이십니까?”
연가는 선의 왼쪽 손목에 오방색 팔찌를 채워주며 말했다.
“10년 전에도 어떤 나리께 이 팔찌를 준 적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나리께서 돌아가셨죠. 아까 싸리문 밖에 종사관 나리를 봤을 때, 주변으로 잡귀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여 종사관 나리도 필요한 것 같아서요.”
“어쩌십니까. 나리가 저주에 걸렸나 봅니다.”
마 부장은 걱정스럽게 선을 보며 말했다.
“이 팔찌는 절대 손에서 풀면 안 됩니다.”
“난 주술이나 귀신은 믿지 않소만, 내 생각을 해서 준 것이니 고맙게 받겠소. 그럼, 내일 포청에서 봅시다.”
선은 연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마 부장과 신당에서 나왔다. 싸리문을 열고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갑자기 연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급히 신당에 들어와 보니 금줄로 묶인 단지의 뚜껑에 작은 금이 생긴 것이 연가의 눈에 들어 왔다. 자리에 앉아 깊은 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쓴 부적을 단지뚜껑에 단단히 부쳤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포도청 안이 시끄러웠다. 포도대장 앞에 가마니로 덮인 시신이 있었고, 그리고 김좌수가 그 옆에 서 있었다.
“이놈이 우리 집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자결했단 말이오.”
김좌수가 말했다.
“장 포졸은 어젯밤 본 일을 소상히 말하거라!”
“어제 이 포졸이 포청에 나오지 않아 제가 저녁에 집으로 찾아갔습니다요.”
“그럼 김좌수댁에 불을 지르는 걸 못 봤단 말이냐?”
“네, 그건 보지 못했고, 제가 이 포졸 집에 도착 했을 땐 방 앞에 짚신이 두 짝 있었습니다요. 그래서 집에 있나 하고 불러보려 했는데, 갑자기 방이 환해지더니 불이…”
장 포졸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떨며 말했다. 선은 장 포졸의 말에 가마니를 들춰 이 포졸의 모습을 확인했다. 불에 탔지만, 눈알이 없는 채 마른 모습인데, 시신에 선의 손이 닿자, 선은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가슴 통증과 함께 눈앞에 흐릿한 환영 스치듯 지나갔다.
바로 이 포졸이 죽기 전 그의 허리춤에서 빛나는 붉은 빛과 홀린 듯한 멍한 얼굴로 방에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선의 곁에 있던 마 부장은 선에게 다시 가슴 통증이 시작되었나 걱정돼 물었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마 부장이 선의 어깨에 손을 대자 선의 어지러움과 통증이 사라지고 환영도 사라졌다. 식은땀이 흐른 선은 연가의 신당에서 준 오방색 팔찌가 이상한 환영을 보게 하는 것인가 의심했다. 정신을 차린 선은 포도대장에게 말했다.
“이 포졸의 죽은 모습이 얼마 전 죽은 여인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방화하고 자결했다고 믿기 어려우니 시신은 검시하고 주변 탐문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여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해 실족한 것이 아니더냐. 그것과 이 포졸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이냐. 말도 안 된다.”
“박 종사관, 이놈은 우리 집에 불을 지른 범인이요. 이상하게 몰고 가지 마시오!”
김좌수는 선을 나무라듯 화를 냈고, 포도대장은 김좌수의 편을 들었다.
“이 사건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밤 순찰을 더 늘리도록 하라!”
포도대장의 명령에 포졸들은 이 포졸의 시신을 옆에 놓인 수레에 실었다. 김좌수는 따라 온 유향소 향원과 함께 포도청을 나가면서 선을 힐끔 보았다. 김좌수가 나가자, 포도대장이 나가는 김좌수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명령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내 명을 따르거라.”
포도대장이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장 포졸이 앞에서 수레를 끌고, 그 뒤를 다른 포졸이 따라나섰다. 선은 포도대장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김좌수의 집과 이 포졸의 집을 조사하기 위해 포도청을 나서며 선을 따라 나온 마 부장에게 조용히 말했다.
“자넨 은밀히 흑월각을 조사해 주시게.”
“흑월각을요?”
“특히 김좌수가 흑월각 객주 송만석과 비밀 거래를 하는지 알아봐 주고.”
“알겠습니다.”
선은 마 부장에게 조용히 지시하고 포도청을 떠났다.
해가 중천이라 유씨 부인은 성주댁과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돌석아범이 대문을 열었더니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뉘시요?”
사내는 평범한 머슴 복장에 지게에 큰 쌀가마니를 메고 있었다.
“여기가 박 종사관 나리 댁인가유?”
“맞네.”
“누가 왔느냐?”
유씨 부인이 대문에 나와 물었다.
“안녕하세유.”
사내는 한껏 밝아 보이게 목소리를 높여 인사했다.
“그렇네. 누가 보내서 왔는가?”
“지는 송객주께서 보내서 왔어유. 이 댁에 쌀을 전해드리고 집안일도 좀 도우라고.”
“송객주가?”
유씨 부인은 부담스러운 송객주의 친절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사내는 막무가내로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지고 있던 지게를 내려놓았다.
“아이구, 이 무거운 걸 지고 왔더니 목이 마르네유. 물 한 모금 마시고 일 해두 되지유?”
유씨 부인은 내키지 않은 방문에 불편했지만, 돌석아범은 마침 혼자 하기 힘든 일이 있어 미루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말했다.
“마님, 송객주께서 우리 처지를 잘 아시고 보내셨겠지유. 며칠만 두고 봐유.”
“그럼, 자네가 이삼일 잘 데리고 있다가 보내게.”
유씨 부인이 부엌으로 들어가려던 이때, 열린 대문으로 솔이 들어왔다. 솔은 도시락을 싼 보자기를 들고 들어오는데, 솔이의 연분홍 치마에 송만석이 준 붉은 조각 노리개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돌석아범은 성주댁이 가지고 나온 물 그릇을 사내에게 건네고, 사내는 눈치를 보다가 물을 다 마시고는 성주댁에게 그릇을 건넸다. 그리고 돌석아범과 함께 뒷마당 창고로 갔다.
“어머니, 포도청에 갔는데 오라버니가 안 계셔서 그냥 들고 왔어요.”
“그랬구나.”
“저 사람은 누구예요?”
“송객주가 쌀을 보내면서 일할 사람을 같이 보냈더구나. 저녁에 약밥이라도 만들어 줄 터이니 네가 송객주에게 전해주고 오너라. 고맙다는 에미 서찰도 같이.”
“네.”
솔이는 부엌에 도시락을 놓고 별채로 갔다.
시전이 길게 늘어선 장터에 선이 이 포졸의 집으로 가려고 지나고 있었다.
그때 맞은 편에서 송만석이 상단을 이끌고 걸어오는데, 선을 보고 반가워하며 선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선은 송만석을 보자 가슴이 칼로 찌르는 듯 통증이 몰려왔다. 연가의 오방색 팔찌 덕분에 가슴 통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아파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찼다.
“이보게, 박 종사관. 어디 아픈가?”
송만석이 선의 어깨에 손을 얹자, 선의 눈에 환영이 보이는데, 송만석 주변에 검은 형체가 선의 어깨에 손을 얹은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괜찮냐고 묻는 송만석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내 물건을 찾아와.”
선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10년 전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진 선, 다시 환영이 보였다. 아버지 박윤이 단검으로 스스로 목을 긋고 쓰러지는 모습, 선의 얼굴로 튄 붉은 핏자국과 가슴에 뭔가 박힌 듯한 통증.
난전 상인들과 물건을 사러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선의 괴로워하는 모습이 교차하면서 정신을 잃기 직전, 송만석은 쓰러지는 선을 부축했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사이에 연가가 있었다. 그리고 연가의 눈에 선과 송만석 사이 붉은빛과 검은 형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