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전 상인들과 구경나온 사람들,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복잡한 장터 안에서 송만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은 통증은 멈추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연가의 눈에 비친 송만석 뒤를 단단히 지키고 서 있는 검은 형체는 분명 흑범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연가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선의 옆에 앉아서 붉은빛이 나는 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용히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다 말했다.
“*제법무아……. 나리, 정신이 드십니까?”
잠시 후, 선의 통증이 잦아들었고, 연가의 주문이 송만석 안의 흑범에게 통했는지 송만석은 선에게 떨어져 서서, 본래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박 종사관, 괜찮나?”
선이 고개를 들어 송만석을 보니 더 이상 검은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연가와 눈이 마주치자, 아픔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송만석에게 말했다.
“송구합니다. 갑자기 통증이 와서. 그럼 전 볼일 있어서.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송구라니. 무슨 말인가. 자네가 큰 병이라도 난건 아닌지 걱정했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으나 자네 모친과 누이를 생각해서 건강 잘 챙기게.”
연가는 선에게 말하는 송만석을 경계하듯 보았다. 그러다 송만석과 눈이 마주친 연가는 선을 무서운 기로 누르던 그 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리, 어서 포청으로 가시죠.”
송만석은 포도청으로 가려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송만석의 귓가에 연가를 피해 자리를 떠나라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송만석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선과 연가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장터를 빠져나와 김좌수의 집 앞을 지나는 선과 연가. 연가는 포도청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에 물었다.
“지금 포청으로 가는 게 아닙니까?”
“제가 연무당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그곳으로 가려는 것입니다.”
연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선의 뒤를 따라 걸었다. 김좌수 집의 긴 담장을 지나자, 초가집이 모여있는 골목에 들어섰다. 한 집 한 집 지나며 걷다 보니 화재로 집이 모두 전소된 이 포졸의 집이 보였다. 앞서 걷던 선이 그 집 앞에 멈췄고, 뒤따라 도착한 연가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젯밤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두 건 있었지요. 하나는 아까 지나쳤던 김좌수댁 그리고 하나는 그 댁에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이 포졸의 집 바로 여깁니다.”
“이 집에서 죽은 사람은 억울하겠네요.”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연가는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은 형체에 소름이 돋았다.
“이 집에서 죽은 억울한 혼이 눈이 없어 길을 찾지 못하고 이곳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맞아요. 눈이 없었어요. 그것이 다 보이십니까? 그럼 혹시 그 혼에서 붉은빛이 보이십니까?”
“붉은빛이요?”
“저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이 포졸의 시신을 확인하려고 손을 댔을 때 환영처럼 이 포졸이 보였습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횃불을 든 손에 화상을 입었는데, 허리춤 작은 주머니에서 붉은빛이 보였어요.”
“나리는 언제부터 환영을 보셨나요?”
“연무당의 신당에서 이 오방색 팔찌를 받고 난 후가 아닐지 짐작합니다. 그전에는 흉통만 있었거든요.”
“역시 10년 전 그 저주가 나리께 이어졌군요.”
“저주… 제 흉통이 그것과 관련 있습니까?”
“맞아요. 흉통의 원인인 붉은빛이 나리께도 보이는데, 10년 전 부사직 나리께서 돌아가신 후 그 붉은빛은 그놈이 남긴 흔적이었죠. 사람의 기를 흡수하고 나면 생기는 결정체. 일단 여길 벗어나야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벌어진 일이라는 건가요?”
“부사직 나리가 부친이셨군요. 역시 우연히 벌어지는 일은 없네요.”
연가는 이 집에 있는 불길한 혼의 기운에 힘들어하며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여길 벗어난 곳에서 하시죠.”
선은 힘들어하는 연가를 부축해서 이 포졸의 집에서 나오는데, 이장이 두 사람을 보고 다가와서는 연가를 보며 말했다.
“이 집이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래서 온 겐가?”
연가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그저 억울하게 죽은 이가 없는지 살펴보러 왔습니다. 그나저나 마을 당산제는 차질 없도록 준비해 주시는 거죠? 신월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당연히 준비 잘하고 있지. 걱정하지 말게. 이번 당산제는 우리 마을 안 좋은 기운을 다 씻었으면 좋겠구먼.”
선은 이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르신, 이 집이 불나던 날 수상한 사람이 다니는 거 본적 없으세요?”
선의 물음에 이장은 연가와 다른 건조한 말투로 답했다.
“난 아무것도 못 봤네. 참, 며칠 전부터 이 포졸이 헛소리하고 다니긴 했지.”
“헛소리요?”
“뭐 자기가 큰돈이 생기면 곧 이 집을 떠날 거라나. 아니 포졸 해서 얼마를 번다고 큰돈이 생긴단 말인가. 뒤가 구린 일을 하지 않은 담에야… 뭐 흑월각 일을 몰래 했으려나? 하여튼 헛소리야.”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한 이유를 짐작하십니까?”
선의 계속된 질문에 이장은 짜증을 겨우 누르면서 말했다.
“그 저수지 주변에서 시신 발견한 날부터 헛소리한 거 같네. 그리구 내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10년 전에 자네 부친이 호랑이를 잘 못 잡아서 지금까지 계속 우리 마을이 안 좋은 일이 생기고 있는 거 아나? 그 일이 있기 전엔 이런 흉한 일 없는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구. 이렇게 범인을 찾는다고 나타날 것 같나? 원인을 뽑아버려야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연무당, 당산제 때 보세.”
이장은 선의 말에 답하지 않고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뒤도 보지 않고 가는 이장의 뒷모습을 보며 선은 억울한 누명을 벗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연가가 선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저주를 풀 방법만 있으면 더 이상 이런 일은 안 생길껍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제 아버지의 억울함도 같이 풀고 싶습니다.”
“신당에 오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선은 연가라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낮과 다른 어둡고 인적이 드문 장터에 검은 복면을 한 마 부장이 주변을 경계하며 걷다가 흑월각 옆 담 아래 몸을 숨겼다. 달빛을 받은 흑월각은 마 부장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허리춤에서 호신용으로 준비한 단검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담을 훌쩍 넘어 흑월각 안으로 잠입했다.
‘낮에 한 번 둘러보길 잘했군. 길눈이 어두운 나리가 왔으면 분명 헤맸을 거야. 그러니 나리가 나처럼 길눈이 밝은 사람에게 부탁했겠지.’
마 부장은 자신감 찬 모습으로 당당하게 걷다가 갑자기 밤 고양이가 마 부장 옆을 스치듯 지나가자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일어나 심호흡을 한 뒤 본채 뒤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마 부장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맞은편 무장한 창고지기 겸 송만석의 수하가 서 있었다. 놀란 마 부장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총 5개의 창고가 있었는데, 그중 다섯 번째 창고가 비밀 장부가 보관된 서고였다. 창고마다 무장한 수하가 창고를 지키고 있는데, 마침, 다섯 번째 창고의 수하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마 부장은 수하들의 눈을 피해 재빨리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가와 헤어지고, 포도청에 돌아온 선은 마 부장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보초를 서는 포졸에게 마 부장을 보았는지 물어보았지만, 포졸은 선과 같이 나간 이후로 포도청에 다시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은 마 부장이 아직 흑월각에서 비밀 장부를 찾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포도청을 나와 흑월각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장터를 지나 흑월각 앞에 도착한 선은 몰래 들어갈지 고민하며 잠시 망설였다. 낮에 본 흑월각은 번잡하고 활기찬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밤이 깊어진 지금의 흑월각은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가 짙게 깔려 차갑고 어두운 기운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몰래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옆 담장으로 가서 안의 상황을 살펴보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훌쩍 뛰어서 담을 넘었다. 다행히 잘 관리된 흙바닥이어서 선이 담을 넘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마 부장은 비밀 서고에서 쌓여있는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구석에서 낡은 궤짝을 찾았다. 그리고 궤짝을 열어 뭐가 있는지 확인하려는데,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놀란 마 부장은 궤짝 옆 가마니로 덮어진 물건이 있는 곳으로 가서 가마니를 들고 그 속에 숨었다.
밖이 조용해지자 조심스럽게 가마니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마 부장의 눈에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 상자가 보였다. 마 부장은 가마니를 쓴 채 상자를 열어 보았다. 붉은 조각이 가득 있고 그 바닥에 검은색의 장부가 있었다. 찾았다는 생각에 비밀 장부를 꺼내려는데, 서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상자를 닫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막았다.
흑월각 위로 떴던 반달은 어느새 멀리 지나가 버렸다. 선은 본채 주변을 몰래 다니면서 마 부장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삼각(약 45분 정도)이 지났을까? 선은 본채 뒤 담장에 작은 문을 발견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문을 조금 열어 그 틈으로 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놀라운 현장을 목격했다. 송만석과 김좌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장한 송만석의 수하들이 몇몇은 횃불을 들고 몇몇은 누군가를 멍석말이하고 있었다. 매질을 멈추고 수하들이 멍석 안에서 만신창이가 된 남자를 꺼내는데, 선은 유심히 그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마 부장!! 괜찮나?”
송만석과 김좌수는 선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 수하들에게 마 부장을 놓아주라고 말했다. 선은 쓰러진 마 부장을 안고 말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감히 포도청 관원을 건드리다니.”
“이보시게, 박 종사관. 우린 포도청 관원을 건드린 것이 아니라 좀도둑을 잡은걸세.”
김좌수의 말에 송만석이 거들었다.
“맞네. 이 자가 몰래 우리 창고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훔치려 했네. 아무리 관원의 봉급이 적다고 하나 이래서야 쓰나. 그래서 본을 보여준 것뿐이네. 포도청에 신고했다면 그마저 받는 봉급도 못 받고 감옥살이할 거 아닌가.”
송만석은 김좌수에게 말했다.
“여긴 제가 잘 정리할 터이니 좌수 나리는 댁에 가 계시지요.”
송만석의 말에 김좌수는 별말을 하지 못하고 순순히 흑월각을 빠져나갔다. 김좌수가 가고 선과 마 부장 주변으로 송만석의 수하들이 둘러싸고, 그 뒤에 송만석이 서 있었다.
“내 불찰이니, 다신 이런 일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만 보내주시지요.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으니 부탁드립니다.”
선의 말에 송만석이 좀 전과 다른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시간이 없다. 빨리 내 물건을 가져오지 않으면, 니 주변 사람들이 다 이리될 것이다.”
송만석의 말이 끝나자, 선의 눈에 환영이 보이는데, 그것은 송만석 뒤 검은 형체, 흑범이었다. 그리고 마 부장이 선을 밀치고 비틀거리며 서서 자신의 허리춤 칼집에서 단검을 꺼내 자신의 목에 댔다.
“안돼!!”
선은 필사적으로 마 부장에게 달려가 손에 든 단검을 빼앗으려 했으나, 어디서 나온 힘인지 마 부장은 한 손으로 선을 밀쳐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그었다. 선은 절규하며 마 부장의 목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아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 모습을 송만석 뒤 흑범이 지켜보았다.
*제법무아 : 세상의 모든 존재나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는 뜻. 고통스러운 ‘나’라는 생각이나 ‘내 것’이라는 집착 또한 실체가 없음을 알면, 그 대상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 불교교리 삼법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