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산속을 걷던 솔, 눈앞에 소복 차림의 어머니 유씨 부인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고, 따라잡으려 빠르게 걷지만 유씨 부인에게 닿지 못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유씨 부인은 보이지 않았고, 앞에 복면한 남자 둘이 나타났다.
“누, 누구세요?”
“조용히 하면 죽지는 않을 것이오.”
솔이 도망가려 하자 재빨리 준비한 보자기를 뒤집어씌우고 어깨에 둘러멨다. 솔이 발버둥 치자, 옆에 있던 남자가 솔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축 늘어진 솔. 두 남자는 그대로 산속으로 사라지는데, 솔의 머리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길 따라 떨어졌다.
같은 시각, 복면을 한 선이 김좌수의 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섰다. 그리고 메고 있던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쪽지를 꽂고 쇠뇌에 화살을 걸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김좌수가 있는 사랑채를 향해 쇠뇌를 발사했다.
화살은 정확히 김좌수의 집 사랑채 기둥에 꽂혔고, 사랑채에 있던 김좌수가 방에서 놀라 나와보니 기둥에 꽂힌 화살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좌수는 불안감이 커지면서 소리쳤다.
“아무도 없느냐? 집에 괴한이 들었다.”
김좌수의 외침에, 행랑채에 있던 머슴 여럿이 달려 나왔다.
“어서 찾아보거라!”
김좌수의 불호령에 머슴들은 집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김좌수는 화살을 뽑고 쪽지를 읽어보았다.
[비밀 장부를 가지고 있다. 스스로 죄를 고하고 죗값을 받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입을 것이다.]
‘종사관 이놈이……’
김좌수는 선의 짓임을 확신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말했다.
“수상한 놈이 담을 넘을 수도 있으니 여기서 보초를 서거라.”
두려움에 쪽지를 주먹에 꼭 쥐고 방으로 들어갔고, 행랑아범은 머슴을 둘씩 짝지어 사랑채 앞을 지키도록 했다.
김좌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확인한 선은 언덕을 내려와 주변을 살피며 포도청으로 향했다. 마을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골목을 지날 때마다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불에 탄 채 방치된 본가와 이 포졸의 집을 생각하면 자기 때문에 마을이 폐허로 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자시(23시~1시)가 넘은 시각이지만, 포도청 안은 횃불로 환했다. 이 포졸의 집에서 옮겨온 다섯 구의 시신이 포도청 앞마당에 나란히 가마니에 덮인 채 있었다. 포도대장과 포졸들은 저주에 걸렸을지 모를 여러 구의 시신을 앞에 놓고 손댈 수 없어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박 종사관은 아직 소식이 없느냐?”
포도대장이 포졸들에게 물었다.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 하시고 아직이십니다.”
시신을 옮긴 포졸이 대답했다.
“더 이상 지체 말고 시신들을 시구문 밖에서 화장하거라.”
“네? 종사관 나리가 조사할 것이 더 있다고 하셨는데요?”
“이놈이! 내 명을 거역할 셈이냐? 박 종사관은 오지도 않는데 무슨 조사냐. 마을에 안 좋은 역병이라도 돌면 네놈이 책임질 것이냐?”
포도대장의 호통에 포졸은 대꾸할 수 없었다. 저주가 옮을까 봐 시신에 손대기를 망설이던 포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쭈뼛댔다. 이때, 포도청 안으로 선이 들어왔다.
포도대장은 선을 보자 놀라며 말했다.
“그 복면은 무엇이냐? 지금 날 겁박하러 온 것이냐?”
“겁박이라뇨. 흑월각 증좌를 찾아왔습니다.”
“뭐, 뭐? 증좌?”
선은 저고리 앞섶에서 비밀 장부를 꺼내 포도대장 앞에 보였다.
“이것이 흑월각의 비밀 장부입니다. 송 객주에게 약점 잡힐 일이 없으시다면 이 장부로 흑월각 송 객주를 잡아들이십시오.”
“그, 그 장부를 내게 넘기면 송 객주를 조사할 것이다. 자넨 그 복면을 벗고 자네 일을 하라. 명이다.”
“진정 이 장부를 넘기면 송 객주를 조사할 것입니까? 제가 포도대장 나리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선이 포도대장에게 장부를 넘기려 하는데, 시신들의 손에 쥐고 있던 붉은 조각이 빛을 내며 선의 가슴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연가가 준 오방색 팔찌가 끊어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쓰러질 듯 시신이 있는 쪽에 넘어진 선. 송만석 수하에게 손이 닿자, 환영이 보였다. 송만석이 수하에게 뭔가를 건네고, 수하는 그것을 받고 흑월각을 나가려는데 뒤를 따르던 검은 그림자가 수하를 공격하고 쓰러진 수하를 비밀 사당으로 끌고 갔다.
시신에서 손을 떼자, 환영은 사라졌고, 선은 바닥에 떨어진 오방색 팔찌를 주워 일어났다. 그리고 그 옆 다른 시신의 머리에 손을 얹자, 또다시 환영이 보였다. 흑월각에서 송만석에게 붉은빛이 나는 주머니를 받는 4명의 장정의 모습과 선의 집 앞에서 송만석의 수하와 만나는 모습이었다.
선은 지금 송만석에게 갔다가는 오히려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신월까지 기다렸다가 연가와 함께 송만석 안의 그놈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밀 장부를 챙겨 포도청 밖으로 나갔다. 포도대장은 비밀 장부를 넘기지 않은 선을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은밀히 포졸 한 명을 따로 불렀다.
솔은 폐가에 결박당한 채 기절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이마에 흐르던 피는 굳어서 자국이 남았고, 그 앞에 송만석이 서서 솔이를 내려보고 있고, 그리고 그 옆에 검은 그림자 흑범이 있었다.
송만석은 솔이의 목에 붉은 조각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두며 말했다.
“이 아이만은 살려주시오.”
“내 물건만 찾으면 이곳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저 아이의 목숨은 네 손에 달렸다는 뜻이지.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 너의 목숨도 내놓을 각오를 하는 게 좋아.”
송만석 역시 질긴 저주의 인연을 끊어내고 싶었지만, 선이 순순히 그 물건을 가지고 올진 알 수 없었다.
이른 아침, 신당에 있던 연가는 제단 옆에 둔 단지 뚜껑의 금이 더 벌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신당에서 나온 연가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침의 찬 공기로 연무가 가득했지만, 잡귀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고, 싸리문 금줄에 달린 방울도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했다. 괜한 걱정인가 안도하며 솔이 자는 작은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러나 자는 줄 알았던 솔이 없고, 머리맡 솔의 풀어헤쳐진 보따리 속 향주머니에서 붉은빛이 눈에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가 향주머니를 열어 보니, 기분 나쁜 냄새와 붉은 조각이 가득 들어있었다.
사라진 솔이 흑범의 저주가 걸린 향주머니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향주머니를 신당으로 가져가 부적을 쓴 종이로 싸고 봉인해 두었다. 그리고 선에게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마을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선은 포도청에서 온 이후 잠 못 자고 고통에 시달리다가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날이 밝아왔고, 조용한 집에 불에 타서 잠기지 않는 대문을 열고 여러 명의 포졸이 들이닥쳤다.
방에서 자던 선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었다. 포졸 여러 명이 죄인을 압송할 때 쓰는 포승줄과 창을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종사관 나리를 잡아들이라는 명입니다. 같이 포도청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포졸 한 명이 말을 마치자, 다른 포졸이 말했다.
“송구합니다. 집안을 수색하라고 하셔서……”
말을 마치고 바로 다른 포졸들과 함께 불에 탄 집안을 구석구석 수색한다고 들쑤시며 다녔다.
무슨 상황인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무슨 죄목인지 모르겠지만, 포도대장께 지금은 갈 수 없으니 해결할 일을 마치고 조사를 받겠다고 전해주시게.”
“안 됩니다. 지금 저희랑 같이 가지 않으시면 큰일 납니다.”
“그럼, 의복을 갖출 시간을 좀 주시게. 이 차림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며,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쇠뇌, 활 통, 비밀 장부가 들어있는 보따리를 둘러메고 방문을 확 열었다. 놀란 포졸들이 선에게 창을 겨누자, 선은 칼집에 칼이 꽂아져 있는 채로 포졸들과 대치하며 방에서 나왔다. 그때 포승줄을 가지고 있는 포졸이 선을 잡으려 달려들자, 선은 칼집으로 달려드는 포졸들을 하나씩 제압하고 쓰러진 포졸들을 피해 집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터로 향한 선, 그 뒤를 따라 달려오는 포졸들. 선은 연가에게 가기 위해 지름길을 골라 저수지가 있는 숲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반 시진쯤 달렸을까? 선은 연가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당산나무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니 포졸들은 따돌린 듯 해 잠시 숨을 고르는데, 맞은편에서 서둘러 내려오는 연가와 눈이 마주쳤다.
“나리, 지금 뵈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저도 연무당과 솔이를 보러 가는 길이었소.”
“송구합니다. 솔이 아가씨가 사라지셨어요.”
“네? 솔이 사라지다니요?”
“흑범의 저주가 깃들어있는 향주머니가 아가씨 짐에 들어있었는데, 그 향이 아가씨를 홀린 것 같아요.”
“향주머니요?”
“네, 붉은 조각이 가득 있었죠. 급한 대로 제가 봉인해 두긴 했는데, 제가 미처 살피지 못했어요.”
“신월이 며칠 남았소?”
“사흘 남았어요. 그때까지 아가씨를 찾아야 할 텐데……”
“지금 준비는 어느 정도 되었소? 그놈의 물건은 대체 뭡니까?”
“필요한 건 다 준비되었어요. 그 단지 안에 있는 물건은……”
연가가 물건의 정체를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선에게 환청이 들렸다.
‘오라버니, 나 좀 구해줘요.’
“솔이 목소리요. 들리시오?”
“네? 아가씨 목소리요?”
“환청일지 모르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봐야겠소.”
연가는 선의 가슴에서 강한 붉은빛을 보았다.
“그놈이 나리의 가슴에 박힌 붉은 조각으로 아가씨를 인질 삼아 불러들일 모양입니다. 무작정 갔다가 나리도 그놈에게 홀릴 수 있어요.”
‘선아, 어미를 살려다오. 답답하구나. 어미를 좀 꺼내다오.’
“어머니, 어머니 목소리도 들리오.”
“나리, 홀리시면 안 됩니다. 정신 차리셔야 해요.”
흑범의 저주는 가슴 통증 대신 환청으로 선을 괴롭히고 있었다. 연가는 당산나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전날까지도 멀쩡했던 당산나무의 금줄이 불에 탄 듯 검게 그을려있었다.
“나리, 일단 저와 신당으로 가시지요. 저주에 걸리지 않도록 대비하지 않으시면 나리도 위험합니다.”
그때 솔이를 찾겠다는 선에게 그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의 누이를 살리려거든 내 물건을 가지고 와라. 그 물건과 내 붉은 피가 널 나에게로 데려다줄 것이니라.’
그 환청을 들은 후 선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고,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연무당과 함께 신당으로 가야겠소.”
연가는 선이 흑범의 저주에 정신이 지배당하기 전에 빨리 신당으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계가 처져 있는 신당에 가야만 선이 정신 차릴 수 있다고 믿었다.
급한 마음에 앞서가는 연가와 뒤따라가는 선. 선의 가슴에서 붉은빛이 더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