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긴긴밤이 지나고 마을은 고요했다. 그리고 동살의 차가운 새벽 공기가 선의 집 마당에 비치면서 집 안의 처참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간신히 화마를 피한 선의 방에서 쪽잠을 자고 있는 솔, 그리고 그 방문 앞에서 선이 밤새 솔이를 지키고 있었다. 앉은 채 잠시 잠이 든 선은 유씨 부인이 남긴 박윤의 피 묻은 옷 조각과 마 부장의 피가 굳은 비밀 장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잠에 빠진 듯 선의 두 손이 스르륵 풀리다가도 갑자기 저주의 물건 때문에 가슴속 붉은 조각이 쉴 새 없이 선의 심장을 옥죄는 탓에 고통을 참으려는 듯 풀린 두 손을 더 꽉 끌어안았다.
연가는 집 곳곳에 잡귀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부적을 붙이며 결계를 만들어놓고 고통을 참는 선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리. 신월이 이레 남았습니다. 나리가 가지고 계신 저주의 물건이 주인에게 가려고 나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 거예요.”
“그놈이 원하는 물건이 뭔지, 저주를 풀 방법이 뭔지 연무당은 이미 알고 있소? 그럼 날 도와주시오. 신월이 저주를 푸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야 시작되기 전에 준비할 것이 아니오.”
연가는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선에게 주며 말했다.
“10년 전 범 잡는 부사직나리가 절 찾아오셨죠. 산속을 헤맸는지 넋이 빠진 모습으로 말입니다.”
연가의 말에 그 사람이 바로 아버지 박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쪽지에 적혀있는 것은 부사직 나리가 그놈을 다치게 해서 생긴 저주입니다. 그것들을 모두 구해서 신월의 밤에 그놈의 물건을 같이 태우면 그놈은 소멸되는 것이죠.”
“헌데 그 얘기는 내 부친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왜 이제야 말을 하는 것이오? 좀 더 빨리 알았다면 희생을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전 스스로 절 찾아오길 기다렸습니다.”
“내가 10년 전 기억을 잃었었소. 그럼, 지금 송객주 몸속에 그놈이 기생하고 있는 거 맞소?”
“그런 것 같아요. 긴 시간을 사람의 몸에 기생하며 달에 한번 신월에 기생하는 이의 몸에서 나와 자유롭게 다니다가 사람의 기를 흡수하며 버텨왔지요.”
“내가 가지고 있는 저주받은 물건과 마지막 하나를 더 찾으면 되겠군요.”
“마지막 물건…… 제가 부사직나리께 받은 그 물건은 신당에 결계를 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물건, 혹시 백자단지에 금줄 쳐있던 그 단지 맞소?”
“참, 제 신당에 오셨을 때 보셨죠? 안 그래도 나리께서 다녀가시고 단지 뚜껑에 금이 가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역시 나리 몸속에 그놈이 심어놓은 붉은 조각 때문이었군요.”
선은 품고 있던 옷 조각과 솔이의 붉은 노리개를 연가에게 내밀었다.
“연무당이 이것들을 보관해 주시오. 그리고 염치없지만 솔이도 부탁하오.”
“나리는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김좌수와 포도대장 그리고 송만석의 관계를 끊어야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것 같으니 그것을 먼저 해야겠소.”
선의 말이 끝나자, 잠이 깬 솔이 나오며 말했다.
“나도 오라버니를 돕겠어요.”
“솔아, 넌 연무당을 따라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오라비가 마음 놓고 그놈을 잡을 수 있어.”
“하지만.....”
“맞아요. 솔이아가씨가 여기 계시면 나리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솔은 선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연가의 말에 선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꼭 필요한 짐만 챙긴 솔이는 날이 밝기 전에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연가와 집을 떠났다.
선은 봇짐 속에 비밀 장부를 넣고, 박윤의 쇠뇌와 화살 그리고 단검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침이 밝아오고, 마을 사람들이 일터로 향하는 그 틈에 선은 포도청으로 향했다.
포도청에 도착한 선. 포도대장이 업무를 보는 방으로 들어갔다.
포도대장은 선을 보자 마 부장에 대해 물었다.
“이보게, 며칠 마 부장이 보이지 않는데, 자네 아는가?”
“마 부장의 소식은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송객주와 친밀한 사이인 듯 보였는데, 아닌가요?”
“무... 무슨 소린가. 마을에 벌어진 사건 때문에 지금 감찰관이 온다고 하여 뒤숭숭하구먼. 당장 나가서 마 부장이나 찾아보게!”
당황한 포도대장은 호통쳤지만, 선은 포도대장이 송만석과 깊은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포도대장의 방에서 나온 선은 김좌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포도청을 나가려고 했는데, 포졸 한 명이 뛰어 들어와 말했다.
“포도대장나리 이 포졸의 집에서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선은 발길을 멈추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 포졸의 집에서 무슨 시신?”
“사내 시신이 여러 구 발견 됐습니다.”
포도대장 집무실에서 나온 포도대장이 말했다.
“또? 박 종사관 얼른 가서 조사해 보게!”
선은 포졸들을 이끌고 이 포졸의 집으로 출발했다.
한편, 흑월각 송만석의 접객실에 김좌수와 송만석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 부장이 그 장부를 훔쳤단 말인가? 자넨 어찌 그걸 허술히 관리했단말이냐.”
“걱정 마십시오. 그 장부가 박 종사관의 손에 들어갔다 한들 아무것도 못할 것입니다.”
“내가 요즘 박 종사관 때문에 잠을 설치네. 자꾸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송만석은 김좌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송만석에게 중요한 것은 선이 흑범의 물건을 가져오고, 그래서 자신이 흑범에게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장부가 세상에 드러나도 송만석은 흑월각을 접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이 포졸의 집에 도착한 선은 좁은 마당에 가마니로 덮인 시신 네 구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중 네 명은 마을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던 선은 송만석이 보내서 왔다던 한 사내를 기억해 냈다.
'이 자는 내가 찾던 그 자?'
집에 불을 낸 범인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송만석의 수하가 눈앞에 누워있던 것이었다.
'결국은 송객주인가?'
선은 모든 단서가 송만석과 흑월각을 향한다는 것을 깨닫고 흑월각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포졸들에게 시신을 포도청으로 옮기라고 명하고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데, 이장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선을 찾아왔다.
“아이고, 이게 또 무슨 일인가? 이 사람들이 왜 여기 있는 건가?”
“이장어르신, 아는 자들입니까?”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흑월각에 일자리를 소개해준 자들이네. 그런데 품삯도 못 받고 이 무슨……”
'역시 이 자들도 흑월각과 관련이 있는 자들이군.'
“이장어르신, 제가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 마을을 떠날 수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무슨 소리. 우리 마을을 떠나지 마시게. 자네가 우리 마을을 구할 수 있다는 얘길 들었으니 꼭 우리 마을을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게.”
왜 태도가 바뀌었는지 선은 알지 못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선이 마을을 구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자 산속은 더 어두웠다. 하늘에는 상현달이 높이 떠있었다.
연가의 집 마당에 서 있던 연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곧 초승달이 되겠어……”
방에서 솔이 나와 연가에게 말했다.
“초승달이 뜨고 다음이 신월인가요?”
“맞아요. 검은 달이 되는 신월이죠.”
“오라버니가 별 탈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연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의 가슴 통증도 더 심해질 것이고, 백자단지의 결계도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았다. 백호신의 계시를 받은 연가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마지막 그날을 위해 준비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만 들어가 쉬세요. 오늘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저기 옆 방에 제가 이부자리 펴 두었습니다.”
“연무당은 어디서 자요? 저 때문에 불편해진 건 아닌지……”
“전 신당에서 밤새 할 일이 있답니다. 걱정 마시고 들어가세요.”
연가의 말에 솔이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연가의 작은 방에 들어온 솔은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호롱불을 끄고, 연가가 펴 놓은 이불속으로 들어가 누운 솔은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런데 솔이의 풀어헤쳐진 짐보따리에서 송만석의 향주머니가 보였고, 그 향주머니에서 검은 기운이 퍼지며 솔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편안하게 잠들던 솔이가 악몽을 꾸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바뀌고, 급기야 솔이에게 환청이 들렸다.
“솔아, 어미야. 어서 어미를 살려다오. 솔아.”
“어머니, 제가 구해드릴게요. 기다리세요.”
솔이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에 홀린 넋 빠진 얼굴로 연가의 방에서 나가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부엌을 통해 금줄이 쳐있지 않은 뒷마당으로 나갔다. 너무도 조용히 움직인 탓에 신당에 있던 연가는 솔이 나간 것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