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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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살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에 하나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중 어느 곳이 더 맘에 드느냐?’이다. 사실 이건 나에겐 굉장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각각의 도시나 나라엔 고유하고 특유한 개성과 매력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모스크바파와 상트페테르부르크파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러시아내에서 두 도시의 라이벌리는 매우 강하고 뿌리가 깊다. 예를 들면, 현대적인 세련미와 편리함을 좆는 사람들은 마천루가 즐비하고 첨단적인 색채가 짙은 미래 도시 모스크바를 더 선호한다. 하지만 메트로폴리탄의 북적거림과 조급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여유롭고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고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손을 들어준다. 그렇다고 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작은 도시라는 얘기는 아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면적 면에서 서울과 비슷하고, 인구 면에선 유럽에서 이스탄불, 런던, 모스크바에 이어 4번째로 큰 인구 700만의 대도시이다. 하지만 서울의 여섯 배가 넘는 크기의 모스크바와 비교하면 작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선호도의 차이는 도시 자체의 외형보다는 사람들의 기질 차에서 유인되는 바가 크다. 단순한 비교이긴 하지만, 모스크바의 멘탈리티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다. 반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멘탈리티는 급진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래서 모스크바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인 화려함과 성공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여유 자적하는 멋과 낭만을 좆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처음엔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모스크바를 더 좋아했었다. 페테르부르크를 처음 방문했을 당시 나는 유럽에서 석사 과정을 받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유럽적인 색채가 짙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첫인상은 사실 나에게 그리 새로울 게 없었다. 반면에 모스크바엔 소비에트적인 특성, 유럽적인 특성, 동방적인 특성 그리고 이슬람적인 특성이 두루 혼재해 있었다. 그건 거리의 건물들과 급하게 거리를 오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면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모스크바의 이런 다채로움은 건물들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길 좋아하는 나에게 신선한 구경거리를 제공해 주었고 질리지 않는 재미를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채롭지만 단순한 느낌을 주는 모스크바보다는 단조롭지만 기품이 있고 고즈넉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매력에 더 끌린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비단 날씨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다. 내 삶에서, 러시아에서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의 경제, 정치, 환경 문제 등에 걸쳐서 전방위적인 혹한과 시련의 계절이 도래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겨울을 좋아한다. 추운 날씨는 신선함을 주고, 하얗게 쌓인 눈은 피로에 지친 나의 눈과 세속의 때에 찌들은 나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북유럽과 러시아를 즐겨 찾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어찌 보면 본능과도 같다. 아주 철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까닭도 없이 러시아에 끌렸다. 러시아 명작선과 문학에 매료 됐고, 잡지에 실린 러시아 여성을 흠모했다. 하지만 폐쇄적이고 위험한 이미지가 강했던 공산국가 소련을 그리고 살인적인 높이로 치솟는 루블화를 자랑하던 경제 재제 전의 러시아를 직접 찾는 것은 어불성설 꿈도 못 꿨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렇게 러시아에 와 있다. 본격적으로 러시아 생활을 시작한지도 어언 3년이 넘었다. 그리고 직접 와서 보고 느낀 러시아 사람들과 러시아의 이미지는 서구의 악의적인 뉴스 편집에서 비춰졌던 모습과는 참으로 많이 달랐다. 비록 선동과 선전의 도구로 많이 이용되긴 했지만, 소련 시절 제작된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노래들에서는 짙은 향수와 순수한 영혼이 느껴졌다. 그 시절엔 비록 문화 예술 역시 이념에 경도되어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하긴 했지만, 쇼가 아닌 러시아 민중의 애틋한 마음이 담긴 작품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운동권 가요처럼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운동권 가요에 담긴 순수하고 열정에 찬 정서를 좋아한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소비에트 시절의 명작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를 그 자리에서 세 번 돌려 봤고, 한동안 세르게이 니키틴, 알렉산더 고르드니츠키, 불라트 아쿠자바를 비롯한 옛 가수들의 노래와 러시아 민요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했던 노래는 유리 비즈보브의 연가(戀歌) ‘뜨이 우 미냐 아드나(ты у меня одна)’와 알렉산더 말리닌의 애가(哀歌) ‘오차로바나 오콜도바나(очарована околдована)’였다. 두 노래는 정서가 아주 상반되는데, 둘 다 사랑에 관한 발라드이지만 전자는 잔잔하고 몽환적인 자장가 느낌이라면, 후자는 애절하고 호소력 짙은 록발라드풍의 노래이다. 나는 지금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 노래들을 듣고 있다. 가을의 끝 무렵을 향해 가며 날씨가 추워지니 기분이 센치해지고 더욱 더 이런 노래들이 생각나는 것 같다. 이런 날은 정말이지 빛바랜 낙엽이 수북히 쌓인 모스크바의 공원이나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걸어야 한다. 그리고 안타깝게 스쳐 지나간 옛 인연들을 그리워하며 울적함을 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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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나 고독에 맞서 싸우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의경우엔 산을 타거나 오랜 시간 걷는 것인데, 산이 없는 발트 유럽 지역이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서부 러시아에선 등산이 요원하다. 그래서 나는 공원이나 시내 중심가를 자주 걷는다. 모스크바엔 우리나라로 치면 숲과 같이 큰 공원이 많아서 오랜 시간 산책하기 그만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구불구불 이어진 수로를 따라 장시간 도심을 걷는 재미가 솔솔하다. 하지만 날씨가 나쁘거나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는 무력감 혹은 허무함이 차 오를 땐 혼자 집에서 술을 마신다. 이미 십 수년을 이어 온 이런 음주 습관을 하루라도 빨리 고쳐야 하겠지만, 달콤씁쓸한 술의 유혹을 고독한 독거로부터 떨쳐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특히 상념이 많아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을 때 이런 유혹은 더욱 강해진다. 술에 대한 달달한 기억 그리고 술에 적당히 취했을 때의 기분 좋은 노곤함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음주 습관과 불면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외로움이다.
외로움은 인간의 영혼을 갉아 먹는 가장 무서운 병균 중의 하나다. 고독이나 불안에는 나름의 긍정적인 면이 있다. 고독은 때로 낭만을 가르쳐 주고, 불안은 가끔 나태해진 마음에 긴장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로움은 인간을 나약하고 비참하게 만든다. 외로움은 슬픔을 주고, 우울의 강에 눈물을 채우며, 패배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나는 외로움을 너무도 싫어한다. 하지만 혼자 살고, 혼자 일하고, 혼자 여행하는 나에게 있어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감기와도 같다. 그리고 잠시만 주의를 소홀히 하면 영혼의 면역이 약해져 진한 독감이 되기도 한다. 더욱 안 좋은 것은 감기엔 그나마 약이라도 있지만, 외로움엔 진짜 약도 없다는 것이다. 일로도, 운동으로도, 돈으로도(많은 돈이 있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술로도, 자위로도 아니 그 어떤 무엇으로도 외로움을 채우거나 비워낼 수 없다. 그래서 만약 함께 사는 누군가가 있다면 혹은 같은 길을 걷는 누군가가 있다면, 외로움이 덜해지거나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에게서 해답을 찾아보려는 거다. 그러다 보니 가족을, 동료를, 친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연애도 못하고 있으면서 동거나 결혼을 꿈꾸고, 돈도 인맥도 없으면서 사업을 계획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야 말로 나를 가장 외롭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다. 그래서 그저 그런 가족, 친구, 동료보다는 단 한명이라도 좋으니 샤갈의 연인 벨라와 같은 진정한 인생의 소울메이트를 희구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깜냥의 인생 2막을 꿈꾸며, 남은 생을 함께할 사람과 일을 찾고 있다. 외로움의 옷을 조금이라도 벗고픈 이 꿈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될 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그래왔듯 모든 많은 노력들이 빈 손의 먼지 같은 허무함만 남길지 아니면 그 바램의 일부라도 채워 줄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다. 단순히 운에 기댈 수도 없고, 노력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 자신을 믿고 고통을 견디며, 새벽녘 네바 강을 감도는 안개 속처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내일을 살아내야 한다. 그것만이 내 이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외로움이란 병원균이 수시로 내 영혼을 갉아먹고 내 마음의 빈틈을 노려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울과 허무가 커진다. 불안과 고독이 부정적인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그리고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럼 그렇지 내가’. ‘그럼 그렇지 이 망할 놈의 세상이’. ‘사기꾼 투성이 인간들이 다 그렇지 뭐’.와 같은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생각들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나는 왠지 이 세상이나 사람들과는 맞지 않는 거 같다는 체념이 들게 한다. 그렇다고 종교에 기댈 수는 없다. 종교인들이야 말로 현실적으로 나를 더 힘들게 만드는 위선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나 종교인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신앙을 찾고 싶어 한다. 구원을 희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사랑을 바라고 혁명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 뿐 아니라 나 자신을 혁명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야 말로 내가 지금 편력의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근본 이유이다. 사랑을 찾아서 그리고 사랑의 정치적 이름인 혁명의 방법을 찾아서. 혁명의 시간을 맞기 위해 난 편력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떠돌이 생활을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지속하고, 그저 마지 못해 꾸역 꾸역 오늘 하루를 살아낸다.
https://youtu.be/6H43nhdwAdQ?si=fwKv29GT31qc7v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