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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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태어나고 자란 지금의 러시아 젊은 세대들에게 일종의 레전드와 같은 영화가 있다. 러시아의 제임스 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요절한 배우 세르게이보드로프 주연의 영화 ‘브랏’이 바로 그것이다. 브랏은 우리 말로 하면 형제이다. 암울했던 1990년대 보리스 옐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낭만적 느와르인데, 소비에트 시절 음악들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그리고 2부작 중 1편이 바로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의 유명한 대사 중에 ‘힘은 진실에 있다.’ 라는 말이 있다. ‘브 춈 실라 브랏?(в чём сила брат? 형제여, 힘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실라(сила)’, 즉 힘이라는 단어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힘을 숭상하는 민족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힘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그런 그들이 진정한 힘은 진실에 있다는 대사에 열광한다. 그렇다. 힘은 조작이나 선전 선동에 있지 않다. 푸틴의 거짓된 전쟁은 그래서 힘을 가질 수 없다. 러시아 국민들의 진정한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조작된 여론 조사나 강압적 투표를 통해 러시아 국민 대다수가 전쟁에 찬성하는 것처럼 선전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푸틴을 부추기고 푸틴에게 전쟁의 명분이 되어주는 일부 극단적인 극우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이 전쟁을 좋아하는 러시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전 세계인의 혐오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는 것은 러시아가 처한 지정학적인 위치와 서구의 위협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1990년 대의 악몽을 겪었던 러시아인들에겐 국가와 체제 붕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그 상처가 지금 푸틴의 허구적 전쟁을 지속시키는 침묵과 방관의 원인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발악을 하며 거짓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푸틴과 그의 정권은 결국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아울러 세뇌와 조작, 선전과 선동이 일상적인 권위주의와 전체주의 체제 역시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공허한 이상에 그치지 않고 개개인의 혁명적 사고와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말이다. 영화 대사처럼 힘은 바로 진실에 있고,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영화 ‘브랏’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 나치 부역자였던 스테판반데라에 대한 욕설 섞인 농담이 있는데, 이 인물은 우크라이나에서 애국자로 칭송받기 때문이다. 푸틴의 전쟁 명분이기도 한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와 결부해 이 영화를 보면, 러시아가 지닌 독특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러시아인들의 정서와 경험을 조금 더 정확히 알고, 근현대 러시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떠올리면 1990년대의 혼란했던 러시아의 현실이 현재 러시아의 가까운 미래와 중첩되는 것을 느낀다. 과연 러시아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의 내면에 전염병처럼 만연된 허무와 냉소를 딛고 영화 속의 정의롭고 낭만적인 주인공 다닐라처럼 여유와 유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선 자신들이 영웅처럼 여기는 다닐라처럼 그들 스스로가 진실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원하는 힘을 가질 수 있고, 여유와 유머는 오직 진실된 힘으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이다. 조금 촌스럽지만 낭만적인 향수를 느끼고 싶거나, 19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가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볼 것을 적극 추천한다.
https://youtu.be/eZ2s9IT1gvg?si=nc7WbZmxwGEJYkJ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