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러시아 그리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전에 대학 후배가 택시를 타고 모스크바 시내 밤거리를 지나는 와중에 한 말이 있다.
“모스크바와 여인은 밤에 더 아름답다.”
술이 얼근히 오른 상태에서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화려한 조명이 밝혀진 모스크바 중심가의 야경은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특히 모스크바강을 따라 펼쳐진 ‘모스크바시티’의 현대적인 마천루와 그 주변의 고풍스런 건물들은 서로 묘한 대비를 이루며 마치 SF 영화 속 어느 미래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서울 면적의 6배, 공식 인구 1250만의 대도시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유럽, 소비에트, 이슬람, 아시아 그리고 러시아 전통 양식의 건축물들과 문화가 혼재한 메트로폴리탄 모스크바는 모스크바공국 시대가 열린 1480년대부터 러시아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이 비잔틴 황제의 계승자가 되면서 한때는 ‘제3로마’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제정 러시아 시기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어 소비에트 시절부터 모스크바는 다시금 소련 그리고 러시아의 수도로서 현재까지 기능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스크바의 미래는 어떨까? 과연 수도로서 명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난 개인적으로 그건 러시아의 대외 정책 방향에 달려 있다고 본다. 만약 러시아가 유럽과 단절하고 친아시아로 정책 방향을 튼다면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보다 예카테린부르크, 노보시비리스크 혹은 크라스노야르스크 같은 시베리아의 도시가 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수도 이전은 여러 기업이나 기관 등 제반 인프라와 결부되어 있어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이지만, 세계 최대 시장이자 친러시아 성향 국가가 많은 아시아와도 가까운데다 모스크바에만 지나치게 편중된 개발 정책에서 벗어난 국토 균형 발전이란 명분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러시아가 옛 소련처럼 붕괴되지 않고 현재의 체제를 유지할 때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만약 러시아가 다시 한 번 국가 해체 위기에 처한다면 러시아는 어쩌면 각자 다른 수도를 가진 독립적인 국가들로 분열될 수도 있다. 그럼 모스크바는 예전 모스크바 공국과 같은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제국의 수도가 아닌 유럽 변방국가의 수도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중국을 포함해 러시아도 유럽처럼 다양한 개성을 가진 여러 나라들로 재구성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그럼 다양한 경쟁과 국제 지역 관계의 조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의 기우를 고려하면 현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보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국가로 발전하는 것도 좋은 방향이라고 본다. 그럼 모스크바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며 거대 국가 러시아 나아가 유라시아의 수도로서 계속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모두 현재의 기득권 위정자들과 민중의 선택에 달렸다. 발전이냐 퇴보냐라는 양 갈래 길에서 그들은 지금 국가의 명운을 건 중대한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기로에 서 있다.
현재의 러시아나 모스크바와는 별개로 나는 상트뻬쩨르부르크가 새로운 러시아, 다시 말하면 붕괴된 이후 새롭게 독립한 러시아의 수도가 된 상상을 해 본다. 그럼 이 러시아는 북유럽 및 발트 연안 국가들과의 협력 관계를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고 새로운 지역 정체성 형성과 평화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미 핀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카렐리아에서 성공적인 국경 협력의 사례를 경험한 전례도 있는 만큼 이는 결코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문화적으로도 유럽에 가깝기 때문에 새롭게 형성된 국제 관계 지형에서 이 새로운 러시아는 북유럽과 발트 유럽 발전에 기여하며 역내 번영을 위한 무수한 시너지를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새로운 번영의 패러다임을 인접한 새로운 독립 국가들로 확산시키는 파급효과(spill-over effect)의 산파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의 이와 같은 상상을 만약 지금의 러시아인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찬성하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는 불안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생각은 ‘현재의 러시아가 붕괴되면.’ 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하고 풍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 일부 소수의 기득권층이나 위정자들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파격적인 국가 개조와 사회 변혁이 지금의 러시아에서는 필요하다. 이는 나아가 세계 번영과 안정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와 같은 변화의 동력을 추동할 수 있는 잠재력과 역사적 경험을 내재하고 있다. 내가 이곳을 사랑하고 이곳에 기대와 희망을 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꼭 나의 상상대로가 아니더라도 정상적이며 인류에 호혜적인 국가로 러시아가 변모하는데 일조할 수 있는 변화가 이곳에서 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다른 의미로 더 각별하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나는 내 인생의 2막을 설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더욱 더 평화롭고 풍요로와지기를 바란다. 지금과 같은 전쟁 상황이나 사회 불안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결코 내가 꿈꾸는 현실이나 미래가 아니다. 모스크바가 일종의 내 영혼의 본향처럼 느껴진다면 페테르부르크는 내 새로운 영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처럼 여겨진다. 나는 나의 잃어버린 심장 반쪽을 이곳에서 찾을 것 같은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순응하고 따라야 할 운명과도 같다. 그래서 내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이 곳에 있다. 어떤 역경이나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난 이곳을 그리고 내 다른 심장을 지킬 것이다.
https://youtu.be/1mCCbpsCKM4?si=ozNWVr1jhF5CHyp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