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한자동맹과 국경협력

기억의 정치

by 레테

나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3년 이상의 시간동안 단 한 번도 여권 검사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거리나 지하철에서 경찰들이 대개는 중앙아시아나 카프카스 출신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권을 검사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왜냐하면 이들 지역 출신의 불법 체류자들이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대도시에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달 전 전쟁이 한창일 때 나는 비보르그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자 마자 처음으로 여권 검사를 받았다.

비보르그는 핀란드에서 가장 가까운 러시아의 접경 도시이다. 핀란드는 유럽에서 러시아와 가장 긴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국가인데, 이들 국가의 국경 길이는 서울-부산 거리의 4배 이상이다. 하지만 1939년 당시 소련과 핀란드는 1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각기 적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혹독한 겨울 전쟁을 치룬 전례가 있다. 그래서 두 나라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고 핀란드는 한때 자신들을 식민 지배했던 러시아를 늘 경계한다. 이것을 ‘기억의 정치’라고 하는데, 이는 비단 핀란드 뿐 아니라 러시아 식민 지배를 겪었던 대부분의 소련 소속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같은 발트3국이 그렇고 카프카스의 조지아가 그렇다. 이들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서 러시아에 대한 공격적인 제재를 촉구했고 경계의 시선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들 국가와 러시아가 접경하고 있는 지역들에서는 냉전 이후 새롭게 열린 국경 협력에 대한 기대가 존재해 왔지만 결과는 늘 참담했다. 에스토니아의 나르바와 러시아의 프스코프 그리고 칼리닌그라드가 그렇고, 조지아의 오세티아가 그러하며, 몰도바의 트란실바니아가 그렇다. 유일하게 유의미한 성공 사례를 보여준 곳은 핀란드와 러시아의 공통 생활 권역인 카렐리아였다. 하지만 이것은 이 지역이 아주 오래전부터 핀란드와 러시아의 경계가 모호한 동일 문화권이 형성된 곳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장벽이 크게 기능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결과였다.

카렐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범국경 협력을 통한 평화와 발전은 커녕 불법 이민과 마약 및 암시장이 횡행하는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나르바에서는 에이즈 감염자들이 넘쳐 나고, 프스코프의 국경 지대엔 늘 정치적 긴장이 팽배해 있으며. 유럽 연합과 러시아 협력의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불린 칼리닌그라드는 실패한 협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오세티아에서는 분쟁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한편, 러우전쟁이 발발하고 징집령이 발효되자 유럽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가 된 비보르그를 통해 차를 타고 핀란드를 경유해 탈출하려는 러시아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비보르그는 핀란드 도시였지만 현재는 카렐리아 남부에 면한 러시아 도시이고, 그곳으로 단순 여행을 갔던 나는 그래서 징집령 발효 시기와 맞물려 처음으로 여권을 검사당하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때 핀란드와 러시아간 국경 협력과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한자동맹의 이상과 가치가 유일하게 구현됐던 이곳은 이제 다른 유럽-러시아간 접경 지역처럼 군사적․정치적 긴장이 팽배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https://youtu.be/z9tfHSxqfPE?si=b28OXgfVA4GSda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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