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아빠, 나 이제 (자칭) 작가가 되어볼게요.

by 따티제

아빠는 내가 커서 작가가 될 줄 알았다고 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아빠 생일 선물을 주제로 쓴 글로 장원이라는 1등 상을 받은 후부터였던 것 같다. 친척들이 집에 함께 모여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간 밤, 아빠가 어떤 선물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 아냐고 물으셨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아빠는 내가 드린 양말 두 켤레가 가장 좋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담아 글을 썼다. 그 글은 학교 문집에 실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글을 잘 쓴 게 아니라 아빠가 멋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정말 좋아했다.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붙잡고 있는다고 자주 혼이 났다. 그만큼 글을 읽는 것이 좋았다. 엄마는 어려운 형편에도 내가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읽을거리를 공급해 주셨다. 방문판매 영업에 당해(?) 여러 번 전집을 사 주시기도 하셨고 책이 많은 이웃집에 데려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빌릴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하셨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구립 도서관에 데려가셨다. 실컷 책을 읽고 또 책을 대여해 왔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쓰는 글이라곤 고작 학교 과제나 독후감, 다이어리에 쓰는 일기뿐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성인이 되자 이제 진짜 글을 써 보겠다고 티스토리 블로그를 하나 열었다. 그리고 조금씩 글을 썼다. 주제는 연애 감정이나 일상에서의 통찰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쓴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던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왠지 너무 부끄러웠다. 그렇게 글을 다 지워버렸다. 그래도 글인데 어디 저장이라도 해놓고 지우지. (어디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러다 어느 해부터는 해가 바뀔 때마다 글을 쓰겠다는 다짐과 함께 다이어리를 샀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누군가 다이어리를 우연히 발견하고 먼지 툭툭 털어내 펼쳐볼 때 유행 지난 촌스러움보다는 냄새만으로도 클래식함을 뿜어낼 수 있을 디자인이어야 했다. 그리고 회사를 옮기며 받은 퇴직금으로는 크게 맘먹고 노트북을 샀다. 마시지 않을 커피 한 잔 무심하게 가져다 놓고 스탠드 조명에 의지하여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책장을 들여다보니 글쓰기와 관련된 책들이 쌓여있었다. 이렇게나 주문한 줄도 몰랐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구석구석 꽂혀있는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책들은 바쁜 일상이라는 핑계 속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겨지지 못한 채 책장에 그대로 꽂혀 제값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매일매일 스스로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데시벨로 하루 24시간 나의 시선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제 글을 써야 하는 때라고, 내가 너를 찾아온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라고.


제대로 글을 쓰기로 작정한 것은 상실을 겪고 나서였다. 도저히 그 감정들을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는 밖으로 쏟아내기도 누군가는 속으로 삭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글을 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만 같았다. 글을 쓰는 행위만이 앞뒤가 꽉 막혀버린 그 상황에서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일단 노트북을 열고 새 문서를 열어 키보드 위에 손을 얹어 놓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 살 것 같았다. 글을 쓰며 나는 잠잠할 수 있었다. 글쓰기는 나에게 발산이었고 치유였다. 그와 동시에 치유를 위한 글쓰기 이상의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그 무엇.


무언가를 준비하는 이는 곧 그 무언가가 될 사람일 수 있지만 시험대에 오르고 나서는 더 이상 그 무언가가 될 사람일 수가 없다. 되었거나 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 그동안 되지 않을까 봐 시작하지 못했다. 내 글이 별로라서, 누구도 읽어주지 않아서, 그래서 글을 써도 돈을 버는 데까지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생각한다.


되고 말고는 내가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누가 읽어주든 읽어주지 않든 돈을 벌든 못 벌든 내가 글을 쓰면, 그로써 작가가 되는 것이다.


젊은 날에는 불꽃같은 화려한 성공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니 비록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때로는 지겨워 보이는 일상을 지켜내며 어떠한 가치를 위해 묵묵히 시간을 쌓아가는 이들이 삶 또한 멋지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작품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글을 쓰는 것도 시험대에 오르는 일이 아니라 그저 멋진 일일 수 있겠다 싶었다. 글쓰기의 대가들은 누구나 글쓰기란 기계처럼 제시간에 자리에 앉아 일정 시간을 꾸준히 채워가는 노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나도 그 행복한 노동의 시간을 밟아가려고 한다. 그동안 그렇게나 쓰고 싶어 했던 글을 이제 한번 꾸준히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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