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쓰는 남자들

지드래곤이 양산을 써 주지 않아도.

by 따티제

우리 집 옆에는 큰 공원이 하나 있다. 공원 주변에는 족히 수십 채는 돼 보이는 모 대기업 건물들을 포함해 브랜드 로고가 꼭대기에 박힌 회사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나도 몇 번이나 이 동네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내가 찾는 외국계, 마케팅 포지션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IT 관련 회사들이 많은 것 같았고 그래서 그런지 개발자들을 찾는 공고가 많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내 피드에 뜬 어느 코웃음 나는 SNS 광고문구나 따라 코딩을 배워 직무전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그 공원은 공원 근처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의 출근길이자 퇴근길, 그리고 점심 식사 후 산책길이 된다.


뜨거웠던 지난해 여름, 친구들과 자리를 이동하며 양산을 폈다. 무리와 함께 하던 남사친이 내 양산을 보며 남자들도 눈치 보지 않고 양산을 쓰고 다닐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여름이면 여느 여자들처럼 양산을 쓰고 뙤약볕을 피하고 싶었지만 눈치 때문에 쓰지 못하는 터였다. 화려한 문양 없이 단색으로 된 어두운 우산 같은 양산을 써도 될 텐데, 일단 맑은 날 손에 우산이든 양산이든 뭘 들고 그늘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아직 구경거리가 되는 것 같았다.


모든 남자들이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양산을 쓰는 날이 오려면 무조건 지드래곤이 양산을 한 번 써줘야 한다고 했다.


다 같이 깔깔대며 웃었다. 하지만 내심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싶었다.


우산은 남녀 관계없이 누구나 비가 오면 쓰지만 해 아래 그늘을 만들어 주는 양산은 여성들의 전유물로 각인되어 있다. 백화점 일층의 양산코너에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양산들이 가득하다. 나도 어느 뜨거운 날 엄마가 살짝 씌워준 양산의 위력을 알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양산은 무슨 양산이야, 양산은 엄마들이나 쓰는 거지, 했다. 더위에 헉헉거리던 그날, 양산은 눈 깜짝할 새 양산의 그늘 밑 한편을 오아시스로 만들었다. 벌게진 얼굴 위로 작은 구름이 드리워지니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양산을 샀다. 양산을 상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려한 문양과 색상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최대한 모던하고 담백한 양산을 찾았다. 내 맘에 쏙 드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하늘색과 감색이 적절하게 섞여 시원한 느낌이 드는 양산을 하나 골라왔다. 비가 올 때면 우산으로 써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늘 해가 쨍한 날이면 양산을 챙겼다. 불과 몇 주 사이에 양산이 없이는 나갈 수 없는 양산 의존자가 되었다.


약속을 나갈 때 양산을 쓰고 나가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이다. 먼저, 양산의 위력을 아는 부류. 너도 양산 쓰는구나? 잘했어! 여름에 양산 무조건이야! 그리고, 반대로 양산은 촌스러운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는 부류. 뭐야~ 아줌마같이 웬 양산이야~ 나도 그랬으니까, 기분이 상하진 않는다. 그날, 나는 그 친구에게 양산 전도자가 된다. 다음번엔 무조건 쓰고 나오게 만든다는 각오로. 여자인 나도 이럴진대 남자들이야 오죽할까 싶다. 그런데 몇 주 전, 양산 쓰는 남자를 봤다. 아니 남자들을 봤다. 한 명이 아니었다. 그곳을 걷던 대부분의 남자들이 양산을 쓰고 있었다.


집 옆의 그 공원은 아직 조성된 지 오래되지 않아 나무들의 키가 비교적 작다. 그래서 충분한 그늘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 봄이나 가을, 겨울에는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든 말든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여름은 다르다. 그늘이 관건이다. 그늘이 없는 공원이라니, 아무도 찾지 않는다. 하지만 그곳 밖에 산책할 곳이 없다면 얘기가 다르다. 재택근무를 하던 시기, 점심 식사 후 잠깐의 산책이 너무나 간절했다.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운동량이 너무 부족했고 밥을 먹어도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공원으로 나갔다. 첫날엔 그냥 나갔다 십 분도 못 되어 돌아왔다. 그다음 날엔 시원한 물을 챙겼고, 아, 양산을 챙겼다. 공원을 삼삼오오 걷는 사람들이 간혹 보였고 더위를 식혀주는 수증기가 호수 가장자리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양산 쓰는 남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밥을 먹으러 공원을 가로질러 가야 했든, 식사 후 잠시라도 걸어야 했든, 이곳을 지나가야만 했을 것이고, 매일매일 그 뜨거운 볕을 견디기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한 명이 우산이든 양산이든 그늘을 만들어 줄 무언가를 들고나가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다음 날엔 또 다른 누군가가 그러했을 것이다. 꽃무늬 화려한 양산들은 아니었지만 크고 어두운, 누가 봐도 우산 같은 것들은 아니었다. 밝은 색도 있었고, 조금 화려한 디자인도 있었다. 그런 것들은 함께 사는 엄마나 아내가 손에 들려준 것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모두들 양산의 역할을 해 줄 만한, 그렇다고 너무 우산이어도 안 되는, 적절한 줄다리기를 타는 것 같은 양산 또는 양산 대체품을 골랐을 터였다.


왠지 모르게 내 가슴이 벅찼다. 작년에 지드래곤 이야기를 한 그 친구를 만나면 꼭 이야기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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