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사이
관계에 있어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려 하는 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감정을 더욱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관계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내 비밀스러운 감정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내 감정, 특히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생긴 부정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알려주지 않으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어디엔가 심겨 시한폭탄 같은 열매를 맺고 언젠가는 터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최대한 고여두는 것이 없게 하려고 한다. 감정을 꽁꽁 숨긴 채로 형식적인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참고 참다 상대방을 향한 신뢰가 어느 순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깨져버리면 그때는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 더 이상 소중하지 않아져 버릴까 봐 무섭기도 하다.
감정뿐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의견을 표출하는 문제에서도 비슷한 편이다. 살다 보면 옳고 그름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경우도 물론 많다. 하지만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분별되는 상황들이 분명 존재한다. 아닌 것은 분명히 아닌 상황 말이다. 나에게 아닌 일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도 필요하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잃을까 봐 진짜 그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통 이러한 불편한 감정과 잘못된 상황의 문제는 혼재되어 미묘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면 감정이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할 때, 모 아니면 도로 귀결됐었던 것 같다. 모의 경우, 관계가 서먹해질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날것의 감정을 전달할 만큼 내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받아들여주어 이전보다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반대의 경우 그는 다시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내 경우 관계가 정리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고 저렇게 생각해 봐도 왜 그런 결론이 나게 된 건지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런 일들을 몇 번 겪고 나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었다. 상대방을 ‘그만큼’ 소중히 여겼지만, 상대방은 나를 ‘그만큼’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거칠고 서투르게 내밀한 감정을 내어 비칠 때야 비로소 그와 나의 관계의 본질을 알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혼자만의 착각으로 둘러싸인 관계 속 상대방에게는 나의 민낯이 지나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일을 겪어 낼수록 아주 솔직하기가 조금은 두려워졌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데 아무렇지 않은 척할 때가 더 많아지게 되었다. 굳이 애써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을 채로.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시간이 해결해 주는 편이 더 낫다는 편에 마음이 더 기울어 가는 것 같다. 모든 것들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해치워 버리려고 했던,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조급함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급함으로 나 스스로 재정의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고 하지만 우리는 저마다 너무나도 다른 시간을 살아왔고 그 시간 속에서 겪은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한 관계라 할지라도 서로를 백 프로 다 이해할 수 없을 수밖에 없다. 지금 내 감정과 의견을 상대방이 그저 내가 소중한 존재라고 해서 전부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정말 이기적인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오늘도 나는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앞에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