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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티제 Jul 25. 2023

고객님 안녕하세요? 요청서에 따른 예상금액입니다.

내 가치를 숫자로 표현할 수 있나요?

회사에 다닐 때, 전문가와 고객을 매칭시켜 주는 모 플랫폼에 가입했다. 무료한 직장생활을 환기시킬 자극이 필요하기도 했고 소소하게나마 돈도 더 벌면 좋겠다는 심산이었다. 고객이 전문가에게 견적을 요청하면 전문가가 견적을 발송하는 시스템. 하지만 알고 보니 견적을 발송하려면 건별로 일정 금액을 지출해야 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냥 계정을 없애버려야겠다 하던 찰나, 그래, 이것도 경험이지 하며 몇만 원의 금액을 충전했다. 사실 거래만 성사된다면 그렇게 큰 금액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의 금액이었다. 전문가로 등록하자마자 견적을 요청하는 알람이 왔다. 이렇게나 빨리 요청이 오다니, 신기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 건, 두 건, 계속해서 견적 요청 알람이 이어졌다. 충전하길 잘했다 싶었다. 신나게 견적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다행히 견적을 읽지조차 않은 경우 견적 발송을 위해 내가 지출한 금액은 다시 내 지갑으로 돌아오지만 상대방이 견적을 읽은 경우 그 금액은 그냥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내게 견적을 요청했음에도 내가 제안한 견적에 응하지 않는 이유, 그 이유는 이럴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많았을 것(경쟁이 치열했을 것)이고 내가 제안한 견적이 다른 이들이 제안한 견적보다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비쌌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필까지 빈약하니, 내가 생각해도 작업을 의뢰할 리가 없었다.


   퇴사 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선택적으로 일할 수 있는 프리랜서 일을 시작해보고 싶어 여러 플랫폼들을 둘러봤다. 그러다 이전에 가입해 둔 그 플랫폼이 생각났다. 그때는 겸업처럼 해보려던 일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진지하게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프로필을 조금 더 진정성 있게 보충하고 견적가를 낮춰(기준이 제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률을 높여보기로 했다. 삭제했던 앱을 다시 깔았다. 계정은 그대로 있었고 다행히 충전해 둔 금액도 많이 남아 있었다. 몇 년 만에 새로운 정체성으로 돌아온 그때와는 다른 나, 프로필을 하나씩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해당 플랫폼에서의 이력도 없고 이렇다 할 포트폴리오도 올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프로필이 이전보다 꽤 그럴듯해 보였다. 프로필을 업데이트하니 다시 견적 요청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요청이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프로필을 업데이트 한 보람이 있구나 싶었다. 자, 이제 견적을 보낼 차례. 견적가를 조금 낮은 수준으로 제출해 보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핑퐁핑퐁 의뢰자와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보완한 부분들이 효과가 있었구나 싶었다. 어쨌거나 내가 제출한 견적가는 작업에 대한 세부사항을 다 알지 못한 채로 그야말로 주어진 최소한의 정보를 바탕으로 참고차 보낼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대화가 시작되면 곧바로 의뢰하고자 하는 작업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의미한 대화가 여럿 오갔다. 하지만 실제 거래로 이어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연락을 곧 주겠다고 했지만 연락이 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의뢰인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 중 나라는 선택지가 가장 매력적이어야 거래가 성사되는데 아마 그간의 케이스들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싶다. 기업에서 의뢰해 오는 경우 실무자가 견적까지 알아보고 윗선에 제안했지만 비용효율적이지 않고 작업자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을 수도 있다. 내가 실무자였을 때도 이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손이 달리는 일들을 맡아줄 전문가를 찾았었다. 하지만 매니저의 승인을 받는 건 전문가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이유가 아니었다 해도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수년 전 양상과는 다르게 거래로 연결되기 직전까지 대화가 이어지면서 요청에 대한 예상 견적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 이건 내 일이다 싶은 일에 대한 예상 견적 요청이 들어오면 나름 합리적이라 생각되는 숫자를 써내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나를 모르는 것만큼이나 나도 상대방을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숫자로 어필해야만 했다. 일단 대화나 시작해 보겠다고 마냥 적게 낼 수도 없었고 그래도 이 일은 내가 제일 잘할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으로 높게 써낸다 한들 간택될 확률만 더 낮아질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었다. 어느 순간 내가 적어 내는 숫자가 나의 몸 값같이 느껴졌고 씁쓸해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계속해서 들어오는 요청들 앞에 나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양보할 수 없는 시간당 가치를 숫자로 환산해 보려 여전히 머리를 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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