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담양에 위치한 대나무숲 공원 죽녹원은 오래전부터 꼭 한 번 가보고 싶던 여행지였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사진 때문이었다. 곧게 높게 하늘로 뻗은 대나무들이 웅장한 숲을 이루어 뜨거운 여름날에도 스산하게까지 느껴지는 어둡고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침 가족들과 근처를 지날 일이 생겼다. 이 때다 싶어 죽녹원에 가자고 했다. 실제로 들른 죽녹원은 인산인해를 이룬 여행객들로 인해 사진의 분위기와는 매우 다르게 느껴졌다. 신비롭기까지 한 깊은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 바람에 서걱서걱 부딪히는 대나무 잎들의 소리를 조용히 들으며 생각에 잠길 수 있으리라던 나의 기대는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래도 대나무 숲은 대나무 숲이었다. 내 키를 훌쩍 뛰어넘어 여차하면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장대한 모습으로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며 늘 그곳에 서 있을 것 같은 대나무 숲. 깊은 대숲 속으로 들어가 비밀을 외쳤다는 모자 장수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비밀(祕密)이라는 단어는 참 신기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비밀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버리면 귀가 쫑긋해진다. 본능적으로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비밀을 듣고 나면 은밀한 무언가를 공유받은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약간은 으쓱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비밀에 숨겨진 가시가 돋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고 비밀을 비밀로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나는 비밀이 많은 편이 아니다. 간혹 너만 알고 있어 라며 비밀이라는 조건을 붙여 이야기를 전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도 ‘당분간은’이라는 전제를 붙인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누군가에게 영원한 비밀을 지켜달라는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비밀을 이야기할 때에도 ‘당분간은’이라는 전제를 붙여주며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제를 붙여주지 않으면 ‘언제까지?’라고 바보같이 물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속내와 다르게 대부분은 기한 없는 비밀들이다.
간혹 관계적인 이유로 축하받을 일을 비밀에 부치며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보통 비밀이라 함은 좋지 않은 일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 비밀이라 하면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라 하는 꽁냥꽁냥한 것들이 전부였는데, 성인이 되어 듣게 되는 비밀의 종류는 고통과 슬픔이 수반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혼자만 이렇게 알고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심각한 이야기일 때도 있었다. 그냥 이렇게 듣기만 해도 되는 것인지 싶을 만큼 무거운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심리상담사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상대방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였다. 심리상담사들은 상담이 끝나면 감정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나는 간혹 나에게 투사되는 그 감정들로 인해 힘들기도 했다.
문제의 당사자들이 각각 나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경우도 있었다. 양쪽에서 비밀이라며 쏟아내 버린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뒤섞여 무엇이 비밀이고 무엇이 비밀이 아닌지 혼동스러웠다. 그럴 때면 이전에 들은 비밀이더라도 모든 이야기를 다 모르는 척하며 듣곤 했다. 그런가 하면 당사자에게는 비밀이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비밀 같지는 않은 이야기들도 있었다. 비밀의 여부를 어느 누가 판단할 수 있으리랴마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차라리 그냥 듣고 잊어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잘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응원과 격려가 필요한 비밀은 나누어야만 가벼워질 수 있고 비밀은 둘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고 깊은 수준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재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대나무숲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대나무숲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24시간 상시 대기 중인 스마트폰을 타고 언제 비밀이 전해질 지 모르는 무방비 상태 속에서, 때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는 비밀에 대해서는 이에 대처하는 몇 가지 수칙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듣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상대방을 위해 듣지 않겠다고 말할 용기, 때로는 나를 위해 듣지 않겠다고 말할 용기를 내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