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티제 Nov 15. 2023

화내지 않고 커피값 벌기

이제야 마땅히 그러하고 싶은 태도를 연습해본다

숨고*를 통해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 주는 일을 가끔 하고 있다.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마케팅 일을 하면서 파워포인트를 많이 다루어 보았기에 체크해 놓은 서비스다. 프레젠테이션 제작 외에도 마케팅, 번역, 문서작업 같은 서비스들을 체크해 놓았다. 생각보다 프레젠테이션 제작은 소소하게 기획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디자인하는 재미도 있어 나름 흥미를 느끼고도 있다. 가끔 터무니없는 예산을 제시하거나 목적이 비양심적인 의뢰 건들도 있는데 그런 일들은 물론 절대 받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숨고를 찾는 의뢰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속도, 빨리빨리다. 기한이 다들 촉박하다. 가능한 한 빨리, 보통 하루 이틀 내로 기한을 제시한다. 한 번은 영어로 제작된 한 시간짜리 동영상을 번역 후 자막작업까지 3일 내에 완성해 줄 수 있냐는 의뢰를 받기도 했다. 도대체 예산이 얼마였던 걸까? 어쨌든 나에게는 비교적 우세한 시간적 여유라는 경쟁우위가 있어 마수걸이를 할 수 있었다.


   어제는 아침부터 친구와 커피를 마셨다. 더현대 지하 1층에 위치한 ‘All That Coffee’라고 카페 이름도 참 멋지다. 매장은 의자, 테이블 좌석과 스탠딩 좌석이 있는데 스탠딩 좌석에서 마시면 커피를 몇 백 원 더 할인된 가격에 마실 수 있다.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바의 감성을 느끼며 스탠딩 바에서 커피를 원샷 때리고 가기로 했다. 커피는 육천오백 원. 진한 에스프레소 샷에 우유와 달콤한 휘핑크림을 섞은 베리에이션 음료였다. 빈속을 달래줄 작은 바게트도 함께 나왔다.


   막 커피를 마시려는데 지난번 작업을 해 드렸던 의뢰인의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까지 작업을 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나면 오후는 한가로울 터였다. 해드릴 수 있다고 했다. 지난번 했던 결과물에서 조금의 변형을 가하는 일이었다. 수월하겠다 싶어 지난번 작업물보다 조금 낮추어 견적을 제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일이 나를 하루종일 괴롭힐 줄 몰랐다.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진행되는 일이기에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의뢰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알아서 잘하면 되는 게 아니다. 최대한 상대방의 머릿속에 그려놓은 결과물의 청사진을 알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거듭되는 수정으로 탈탈 털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확인, 또 확인을 하며 가이드를 잡아 작업을 시작, 몇 시간 후 결과물을 전송했다.


   그런데 내게 작업을 의뢰해 주신 분과 실제 의뢰인이 달라 중간 소통 과정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 장문의 수정 피드백이 왔다. 기껏 시간을 들여보내드린 결과물은 실제 의뢰인분의 청사진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화가 치솟았다. 그래서 제가 아까 그렇게 여쭤보았던 건데요? 하면서 나는 곧바로 내 잘못이 아님을 중간 의뢰자에게 피력했다.


   다시 일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상했다. 연봉을 몇천을 받고 하는 일이든 시급을 몇천 원을 받고 하는 일이든 같은 강도로 화가 난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그때는 그 상사 때문에, 정말 중요했던 그 행사 때문에 힘들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와 거의 같은 속도와 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니. 퇴사한 지 일 년이 지났으니 일을 하면서 화가 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천만에 만만에였다.


   소일거리를 찾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사실 내 목적은 나를 장기적으로 고용해 줄 의뢰인을 만나는 것이었기에  관계를 쌓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좋은 관계가 쌓이고 서로의 필요가 충족되면 다음, 그다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단 누구 잘못이든 일은 마무리해야 했다. 그때부터 시급이 커피 값이 될지 안될지 모르는 채로 컴퓨터 앞에 매여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이 어이가 없어 기도가 나왔다. 제가 지금 이 일을 하는 게 당신의 뜻이 아닌 걸까요. 아니면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으신 걸까요. 그러다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남편이 거실에서 내 콧노래 소리를 들으며 드디어 쟤가 이상해졌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마음이 괜찮아졌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밤늦게 최종 결과물을 보내드렸다. 다행히 최종 결과물은 의뢰인의 청사진과 가까웠다. 일을 여러 번 해야 했던 상황을 감안해 비용도 더 챙겨주신다고 하셨다. 알아서 보내주시라고 했다. 그 시간에 대한 시급을 나 스스로 책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들이 오가며 ‘ㅎㅎ’으로 일이 마무리됐다.


   일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내 모습을 마주하며 이제야 마땅히 그러하고 싶은 태도를 연습해본다. 진작 연습했어야 하는 마음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래서 지쳤고, 그래서 부러졌을까. 이렇게 단단해져 갈 그릇엔 더 진하고 달콤한 것들을 담아낼 수 있겠지.


*숨고: 숨은 고수, 전문가 매칭 서비스 플랫폼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 후 1년, 요즘 뭐 하고 지내냐 묻는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