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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티제 Dec 26. 2023

조작된 울산바위의 기억

(feat. 무식하면 용감하다)

예정에 없던 휴가가 생긴 우리는 올해 말이면 유효기간이 종료되는 호텔 숙박권을 사용할 수 있는 곳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바우처 뒷장에 적힌 몇 곳 되지 않는 호텔 체인의 위치를 하나하나 검색했다. 우리의 성향과 지금의 계절을 고려했을 때 가장 좋은 선택이라 여겨지는 곳. 그렇게 우리는 갑분 설악산으로 출발했다.


   밤늦게 도착한 숙소는 설악산 입구까지 몇 분이면 도보로 도착하는 곳에 있었다. 프런트에서는 그곳이 설악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유일한 숙박업소라고 했다. 직원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부심이 느껴졌다. 밤하늘에는 도시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었던 별들이 미친 듯 쏟아졌고 새벽이 깊어지자, 창밖의 바람 소리가 창문을 깰 듯 세차게 불어닥쳤다.


   다음 날 아침, 커튼을 젖혀보니 광활한 겨울 설악산 뷰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설악산과 사랑에 빠진 것만 같았다. 지난밤의 바람 소리가 꿈이었다는 듯 창을 뚫고 뜨거운 햇살이 얼굴에 와 닿았다. 늦은 아침을 맞은 우리는 마음이 급해졌다. 부랴부랴 호텔을 나서 근처 식당에서 아점을 먹고 가볍게 산을 타기로 했다.


   현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는 코스 중, 난도가 높지 않고 서너 시간이면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인터넷으로 찾았다. 소요 시간 2시간, 거리 3.8km, 흔들바위를 거쳐 울산바위까지 올라가는 울산바위 코스가 괜찮아 보였다. 20년 전 친척들과 함께 설악산에 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 속 흔들바위는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 흔들바위에서 울산바위까지의 거리는 1km. 1km 거리니, 그때 울산바위까지 올라갔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별로 힘든 기억이 아니었다. 재난의 전조였다.


   험한 산행은 계획에 없었기에 등산복이나 아이젠, 초콜릿 같은 비상식량은 챙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호텔에 비치되어 있던 생수를 두 병 챙겼다. (안 챙겼으면 큰일 날 뻔했다.) 오래된 기억과 현실의 등산로는 매칭이 되는 구석이 하나 없었다. 그제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13:45. 설악산 입구 도착. 가볍게 두 시간만 걷고 내려와서 바삭바삭한 파전이나 먹고 들어가 쉬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울산바위 코스에 진입했다. 그래, 역시 편한 길이었어. 길이 조금씩 좁아지고 경사가 급해지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여기가 흔들바윈가 저기가 흔들바윈가. 언젠가 흔들바위 근처에 산사태가 났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은데 흔들바위가 추락했다는 가짜뉴스도 많이 떠돌던데 진짜 어디로 떨어져 버린 건 아니겠지! 쓸데없는 생각이 올라올 때쯤 드디어 흔들바위와 마주했다.


   14:45. 흔들바위 도착. 바위를 미는 인증샷을 부랴부랴 찍고 야옹 하며 등산객들을 따라다니는 고양이들을 뒤로하며 우리의 최종 목적지 울산바위를 향했다. 이제 1km 남았다. 비장한 마음으로 롱패딩 지퍼를 끌어 올렸다. 흔들바위까지 2.8km의 거리를 올라오는 데 한 시간이 걸렸는데 삼십 분을 더 걸었는데도 남은 거리가 줄지 않았다. 등산로가 급격히 좁아지고 오르내리기 아슬아슬한 돌계단이 끝없이 펼쳐졌다. 어느새 우리는 가까스로 돌계단 양옆을 이어 세워진 밧줄을 생명줄 마냥 의지해야만 하는 곳을 걷고 있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아찔한 스카이워크에 올라서 있는 것이 아닌데도 갑자기 아찔한 경사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어제 새벽, 숙소 안까지 들려오던 창밖의 그 바람이 면전에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큰 바윗돌 뒤로 바람을 피해 몸을 숨겼다. 바람을 피해 바위 뒤에 숨는다니. 도시인의 자연 체험인가. 바위 뒤에 숨어있던 그때, 하산하는 등산객 무리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ㅡ안녕하세요!

ㅡ안녕하세요! 혹시,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한참 멀었나요?

ㅡ지금 올라가시게요? 지금 시간도 늦었는데. 그리고 정상에 바람이 정말 많이 불어요. 절경 보려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어요. 그냥 올라가지 마세요.

족히 산을 수백 번을 오르내리셨을 것만 같은 베테랑 등산객 아저씨의 입에서 생명의 위협이란 말이 나오다니.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매일 몇 킬로씩 걷는데 고작 이 정도에 진다고?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결단해야 했다. 남은 생수를 탈탈 털어 마신 뒤 만장일치(?)로 하산을 결정했다.


   호텔에 돌아와 가장 먼저 너튜브를 켰다. 울산바위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좀 봐야 했다. 울산바위 해발 873m.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가 4㎞.. 어라? 나는 울산바위는 안 가본 게 분명했다. 1km로 표시된 거리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발이었는데, 그걸 놓치다니. 저기를 그냥 그렇게 빈둥빈둥 가려고 했다고? 무식하면 용감하다. 며칠 후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는 속초의 어느 숙소는 ‘바다뷰’ 객실과 ‘울산바위뷰’ 객실이 있다며 우리의 무모함에 실소를 보냈다.


   그래도 등산이라고 땀이 범벅이 됐다. 샤워하고 각자 침대에 누워 벽걸이 스마트 TV에 유튜브 화면을 띄우고 설악산 탐방로를 무한 재생하기 시작했다. 울산바위 코스에서부터 대청봉 코스, 공룡능선 코스, 금강굴 코스에 이르기까지. 갑자기 등산에 진심이 됐다. 호텔이 갑자기 대피소처럼 느껴졌다. 문을 열고 나가면 설악산 대청봉이 코 앞에 보일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그렇게 목표가 생겨버렸다.


   다음 날, 현실을 자각한 우리는 무장애탐방로나 걷기로 했다. 그래. 지금은 여기가 우리에게 맞지. 설악산 초행길이 분명한 등산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아~ 여기 너무 시시한데 그냥 울산바위나 갈 걸~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간, 그들의 가벼운 복장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우리는 서로 눈으로 말을 건네며 피식-하고 웃었다. 어제 그 등산객 아저씨들도 우릴 보고 그랬을까.


   배꼽이 따갑기 시작했다. 충수 돌기 절제술(aka 맹장 수술)을 한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아차 싶었다. 무리하면 안 됐었는데. 밧줄을 잡으며 산을 오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복압이 많이 들어간 터였다. 울산바위까지 올라갔으면, 내려올 수나 있었을까. 어이없는 웃음이 다시 또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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