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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Feb 10. 2020

부엌의 시간

먹고 치우는 게 일


 은숙 씨는 가족들이 식사를 마칠 때쯤 미리 과일을 준비한다. 표정이 없는 얼굴로 사과를 깎거나 북적거리는 대화를 들으며 웃고는 냉장고에서 씻친 딸기를 꺼냈다. 식탁 앞에서 은숙 씨는 분주하다. 뒤돌아서  빨래 삶는 불을 줄이고 커피 포트에 물도 올린다. 생각에 이르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듯한 광경은 특히나 부엌에서 눈에 띄었다. "먹고 치우는  일이야."라고 은숙 씨는 자주 말한다. 나는  말을  가지 의미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대로 피로감이 있는 노동의 의미.
살아가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의미.
얕잡아  혹은 보통  아니라는 어려움의 의미.


채식을 지향하게 되면서 요즘 매 끼니마다 신경을 쓰고 있다. 차려진 음식을 손쉽게 먹곤 했는데 이제는 직접 해 먹는 날이 더 많다. '아, 엄마가 이 상추 좀 먹어 치우랬는데.' 하며 상추를 깨끗이 씻어 간장과 식초, 설탕, 깨소금을 넣고 조물조물 버무린다. 고기가 들어간 된장찌개가 있는 날에는 야채로 맛을 낸 물에 된장을 풀어 된장국 하나를 또 끓인다. 그렇게 국 하나, 반찬 하나 만드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채수가 우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간을 계속 보며 이제 됐다 싶은 간을 찾기까지의 시간. 어떤 날은 열 번 가까이 맛을 봐야 했다. 먹고 난 자리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절로 커피 생각이 난다. 가족들의 부대끼는 아침 뒷바라지를 완료한 은숙 씨가 커피와 초콜릿을 찾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고 벌써 열 한시야 탄식하며 그제야 앉아서 할 일을 한다. 먹고 치우는 게 정말 일이구나. 몇 끼 해 먹고 나니 조금 알 것 같았다.    


오후 네시면 할머니께서 이른 아침 등교한 주간 센터에서 돌아오신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할머니한테서는 추운 바깥바람 냄새가 났다. 나는 불을 올려 따뜻한 물을 끓인다. 작년 봄에 오빠가 결혼을 한 뒤로 할머니도 식구가 되었는데, 같이 산다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가끔은 번거로울 때도 있었다. 그건 긴 시간 혼자 살아오신 할머니도 그럴 터였다. 주전자에서 칙칙 뜨거운 물이 끓으면 할머니께 대추차를 내어드린다. 큰 대추와 먹기 좋은 생강을 고르고 유리병을 기울여가며 꿀을 한가득 넣어 드릴 때. 나는 할머니를 여전히 좋아한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오늘은 센터에서 뭐 하셨어요? 재밌었어요?" 하면 "요즘 집 값 좀 올랐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의 대화는 일방통행이라서 할머니께서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으신지 마음은 어떠신지를 오히려 쉽게 알 수 있다. 너무 바쁠 때는 생략되는 시간이지만 사실 인사만 하고 방에 돌아갈 때면 영 찜찜하다. 할머니는 식탁에 앉아 쉬고 계신 뒷모습만으로도 마음이 가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저녁이라도 같이 먹곤 한다. 대파를 숭덩 썰어 넣고 말린 표고버섯과 함께 채수를 낸 뒤 잔치국수를 끓여 먹었다. 손녀가 해주는 요리를 다 먹는다며 얼큰한 소리로 빈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는 할머니를 볼 때, 그가 정말 살아계신 것 같다. 부엌은 그렇게 살아있다는 신호를 주고받게 한다. 싱크대에서 흙 묻은 대파를 씻어내고 도마 위에서 신선하게 썰어낼 때 나의 머리도 마음도 생기를 찾았다.


부엌을 정리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힘은 들어도 충전이 되었다. 식탁에서 함께 끼니를 챙기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면 또 다음 동작을 실행할 힘이 어쩐지 생겨난다.


완성된 요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은숙 씨가 쌓아 올린 단정함이 기본이 되어있었다. 마늘을 일일이 다져서 미리 얼려둔다던지, 야채 통에 야채들을 정리해놓는다던지, 커피 머신에 커피를 채우는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단위의 일들. 얼른 해치워야 하는 식재료를 머릿속에 입력한 뒤 무엇을 해 먹을까 고민하는 일도, 다음에 장 볼 때는 무엇을 사 올까 메모하는 일도 일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웠다. 누군가 편하면 누군가는 불편한 거라고 불편함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말하던 은숙 씨의 말이 떠오른다. 딸기를 씻을 때 이렇게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는 걸. 락앤락 통에 예쁘게 들어가 있는 딸기를 편안하게 먹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가족과 24시간을 부대끼며 살아보니 집의 시간과 흐름을 조금씩 읽게 된다. 고정적인 월급을 주는 직장도 사회인으로서 기능을 한다는 안도의 소속감도 부재하지만 요즘 나는 집에서 가장 깊은 소속감을 느낀다. 집에만 있어도 바쁜 하루를 부엌에서 조금 경험한다. 부엌의 시간은 빨리 흐르고 먹고 치우는 일은 여러모로 일이다. 시간이 없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정성을 기울이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오늘도 괜히 주방 도구 사이트를 둘러보고 예쁜 찻잔이 있으면 이미지를 저장했다. 백수이자 주부로 살아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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