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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May 19. 2021

큰오빠와 수제비

돌아보면



큰 오빠가 

군에서 휴가를 나왔습니다. 까까머리에 새까만 얼굴로 큰 샌드백 같은 가방을 메고 집으로 왔습니다. 엄마는 큰 오빠를 보며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낮 시간이면 언제나 언니와 둘이었던 집이었는데 큰 오빠가 와있는 집은 어딘가 꽉 차고 푸근했습니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쁜 꽃그림에 빼먹고 그리지 않은 꽃 그림자처럼 큰 오빠가 슬그머니 옆에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어제와 똑같이 아침 일찍 장사를 나가셨고, 언니와 나는 밖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고무줄놀이를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배가 고파져 집엘 갔습니다. 예쁜 꽃그림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집에서 책만 읽던 큰 오빠가 부엌에서 무언가를 분주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부엌 한 칸에 방 한 칸. 키가 큰 오빠는 아주 불편해 보였습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치대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까까머리와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채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빠야 머하노?"


"어 느그들 점심 무야지. 오빠야가 수제비 해주께. 내가 맛있게 끓일 줄 안다이가."


"진짜로? 오빠야 수제비도 맹글 줄 아나? 엄마가 해주는 게 맛있는데. 오빠야 진짜 할 줄 아나?"


언니와 나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못 미덥다는 듯이 큰 오빠를 빤히 바라봤습니다. 


"에헤이. 오빠야만 믿어바라. 좀만 기다리래이."


배가 고팠던 나와 언니는 좁은 부엌 귀퉁이에서 큰 오빠 옆에 찰싹 붙어 앉았습니다. 그리고 눈에 반짝반짝 빛을 내며 바라봤습니다.


"멀 그리 쳐다보노. 방에 들가 있어라. 다 맹글어가 들고 가께."


큰 오빠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러운 건지 어쩐 건지 헤벌쭉 우릴 보고 웃었습니다.

언니와 나는 오빠의 말은 무시한 채 그 큰 손으로 만든 반죽이 못내 미심쩍어 방에 들어가면서도 부엌과 연결된 방문을 열어놓고 큰 오빠의 일거수일투족을 열심히 감시? 했습니다. 큰 오빠의 머리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연탄불에는 물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요. 뚝딱뚝딱 왔다 갔다 하더니 금세 찬은 하나도 없었지만 수제비 세 그릇을 담은 상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언니와 저는 신기해하면서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의심했던 것과 달리 수제비는 침이 꼴딱 삼켜질 정도로 너무나 먹음직스러웠습니다.


"우아 오빠야 군대에서 이런 것도 갈챠주나. 억수로 맛있겠데이. 잘 묵으께!"


그렇게 한 술 떠서 우악스럽게 입안에 밀어 넣었는데, 그 맛은 엄마가 해주셨던 그 수제비 맛은 아니었습니다.  살짝 당황이 되었습니다. 오물오물 먹으면서 언니와 저는 눈 맞춤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배꼽이 빠져라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오빠야. 수제비를 칼로 썰어 넣었나. 엄마는 손으로 떠 넣던데. 그라고 이리 크면 한 입에 우예 먹노. 근데, 수제비가 달다. 색깔도 시꺼멓네. 그란데 또 희한하게 맛은 와이리 좋노. 오빠야 요리사 해도 되겠데이."


"거봐라. 생긴 기 좀 요상하믄 어떻노. 음식이 맛있으모 장땡이지. 안 그렇나? 맛나제?"


그렇게 말하고는 큰 오빠도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장땡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날 우리 삼 남매는 맛을 먹은 게 아니라 정을 나눠 먹었습니다. 배곯을까 걱정하며 언니와 저를 챙기려던 오빠의 마음을 배부르게 먹었던 날이었습니다.






지나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니 그날의 수제비는 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길게 늘인 다음 칼로 듬성듬성 썰어서, 그냥 간장을 푼 물에다가 넣어서 끓인 것이었다. 당시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던 궁핍한 날들이었다. 엄마는 혼자 무려 5남매를 키우기 위해 종일 밖에서 일을 해야 했고, 나보다 세 살이 많았던 언니는 그런 엄마를 대신해 초등학교 때부터 고사리같은 손으로 밥을 하고 집안일을 했었다. 물론 이후로 나도 커가면서 집안일을 같이 하곤 했었다. 

나이 차가 십 년은 넘게 나는 큰 오빠. 내게는 아버지 대신이었던 큰 오빠. 입하나 덜자고 군에 입대한 건지, 때 돼서 입대한 건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때 당시 군 생활은 3년을 꼬박 채워야 했던 시기였다. 휴가를 나오면 큰 오빠는 항상 어린 우리 자매를 살뜰히 돌보고는 했다.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엄마에게는 든든한 기둥이었다. 우리에게도 든든한 기둥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큰 오빠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큰 오빠와의 추억은 촘촘히 쌓여있는 추억들 중에서도 아래 아래까지 오래오래 들춰내야만 보인다. 그 오래된 기억 속에 뜨끈한 수제비만큼이나 따뜻하게 각인된 그날. 까까머리에 새까맣게 탄 피부, 군복, 마른 몸. 깜박이는 점멸등처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지만 요즘에도 가끔 수제비를 먹다 보면 울컥 이날이 떠오르곤 한다. 

고단했던 엄마의 눈물과 큰 오빠의 돌덩이 어깨와 어리고 철없던 여동생이 보태졌던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올리면 얼굴에 미소가 퍼지곤 하는 그날. 설움 같은 가난을 폭풍 흡입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마음만은 보름달같이 넉넉했던 그날. 


지금도 수제비를 좋아한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그날의 만찬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은 수제비 보다는 그리움을 맛있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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