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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May 16. 2021

그녀의 가방

동고동락 10년째인 백팩이 전하는 말


안녕! 나는 그녀의 가방이야. 오늘은 내 이야기를 해볼 거야.


내가 그녀와 함께한 지 벌써 10년째야. 그녀와 마르고 닳도록 어디 갈 때마다 분신처럼 함께 했어. 내 자랑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보기에는 별거 없는 그냥 평범한 가방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정말 튼튼해. 10년이 지났어도 나는 아픈 데 없이 아주 건강하거든. 어디 한 군데 고장 난 데도 떨어진 데도 없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낡음이 좀 있긴 하지만 그건 탑 쌓듯 쌓아 올린 시간이란 걸 무시하지는 못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장담컨대 다가올 10년도 거뜬할 거야. 내 생각은 그래. 그녀의 생각은 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땡볕이 무서운 대구라는 곳이었어. 그리고, 그때는 그녀 말고 그도 있었지. 사실 나를 처음 만난 건 그였어. 그와 만남으로 그녀도 자연히 만난 거였어. 그가 나를 참 많이 아껴주었는데 그녀 또한 나를 참 애지중지해 주더라고. 내 비어있던 공간 마다마다에 쓸모롭고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소중히 넣고 다녔어. 하찮다면 하찮은 나에게 둘은 살뜰히 정을 주었지. 봄여름가을겨울 나를 메고 안고 들고 끼고 다녔더랬어. 덕분에 나는 외로울 틈도 없이 그와 그녀의 체온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어. 둘 사이에는 항상 내가 있었거든.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어.


그랬는데, 어느 날부턴가 그가 안 보였어. 유일하게 그녀만이 나를 열심히 챙기더라고. 알고 보니 그는 떠난 거였어. 그녀만 남겨두고. 운다는 것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그녀의 눈물이 내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여러 번 받아들였었지. 축축하고 뜨겁고 짭짤한 느낌. 몇 날 며칠을 꿈쩍도 않던 그녀가 너무 애처로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어. 그녀의 눈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그녀는 그후 나를 안고 대구라는 곳을 떠났어. 지금은 다른 곳에서 여전히 그녀와 같이 살고 있어. 그녀는 시간이 꾹꾹 쌓일수록 켜켜이 나에게도 온갖 것들을 자꾸만 꾸역꾸역 집어넣더라. 지금은 내 몸이 많이 무거워졌어. 덩치도 있긴 했지만 무게는 그때그때 달랐었는데 지금은 고정적인 그램 수를 항상 바닥에 깔고 다녀. 이것저것 그녀는 자신에게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내게 넣어두는 거였지. 어딜 가나 나를 데려가고 어딜 가나 나를 옆에 끼고 있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가방쯤은 그냥 두고 나가야 할 자리, 그러니까 나쯤은 사물함에 재워놓고 나가도 될 자리인데도 굳이 그녀는 마치 접착제처럼 나를 붙이고 다니는 바람에 쓴소리를 듣기도 했었어. 그 가방 뭣이라꼬 그렇게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다니냐. 이름도 없고 비싼 것도 아니고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냥 두고 가.라고. 

그런 순간마다 그녀는 개의치 않았어. 그냥 신경 쓰지 마. 이 가방 잃어버리면 안돼서 그래. 곁에 둬야 안심이 돼. 




가끔은 그녀의 집착이 부담스러워서 피곤하기도 해. 또 가끔은 나를 내팽개칠 때도 있어서 아프기도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내가 그녀를 떠날 수가 없어.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열공할 때는 책가방이 되었고, 그녀가 시장에 갈 때는 장바구니가 되었고, 그녀가 놀러 갈 때는 캐리어가 되었고, 그녀가 출근할 때는 사무 가방이 되었고, 그녀가 중요한 서류를 넣을 때는 서류 가방이 되었어. 어떤 것에도 나는 거부감 없이 쑥쑥 받아들이는 변신의 귀재가 되었어. 그녀로 인해서 말이야.

지금도 나는 충실한 그녀의 '소중함'이 되어 옆에 있어. 보물함은 아니지만 보물함만큼 소중한 소중함 말이야. 변치 않는 죽마고우쯤 되겠다. 변함없이 나를 자식처럼 보듬어주고 쓰다듬어주는 그녀 옆에 있는 것이 행복해. 그녀의 인생 한 귀퉁이에 당당히 내가 서있을 수 있어서 나는 좋아. 앞으로의 그녀 삶에도 나는 한 부분이 되어 줄 거야. 그렇게 그녀의 아픔도 기쁨도 슬픔도 토닥이며 서로를 나누며 굳건히 그녀 옆에 있을 거야. 딴딴한 뿌리를 가진 나무처럼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몸을 챙겨야겠지. 이래 봬도 썩 동안이긴 하지만, 나도 쉽게 늙어가기는 싫으니 건강 보조제라도 먹어야 할까 봐. 오늘도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주고 있어. 나도 그녀와 예쁘게 눈 맞춤을 해줘야겠어.

나는 그녀 곁에서 오늘도 함께하는 그녀의 가방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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