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반 시집 20211130
비를 이불처럼 덮어쓴 도시. 회색 머금은 낮을 검은 어둠이 밀어내고 종일 서성대던 바람이 기어코 웅성웅성 대며 이불을 흩뜨리고 있습니다. 창문에서도 벽틈에서도 바람도 추운지 방안을 기웃댑니다. 시간이 만든 긴 자국들 사이사이로 끙차 발을 들여놓습니다.
걷어 두었던 러그를 다시 깔았습니다. 옅은 온기가 도망가지 않도록.
오늘은 휴무라 쉬고 있을 볕을 내일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따뜻함은 이 계절이면 늘, 곁에 있어도 그립기 마련이니까요.
버린 것들에 대하여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버렸다
취한 것이 많은 만큼 버린 것도 많았는데
내가 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에게서
실은 내가 버림받은 것인 줄을 미처 몰랐다
헌 냄비를 찾는데 없다
찻잎 태우겠다고 비린내를 없애야 하는데
버린 지 이미 오래인 찾아도 곁에 없는 것들이
갑자기 그립다
낡았다고 버리고 망가졌다고 버리고
쓰임이 다했다 버리고 귀찮다 하여 버리고
떠나가면서 더러는 돌아보기도 하면서 떠난 것들이
그 순간 나를 버렸음을 지금 알겠다
내가 함부로 버린 것들은 그냥 나를 버린 게 아니었다
그림자를 어둠 속으로 슬쩍 집어넣듯
남긴 것이 있었으니
체취 같기도 하고 지문 같기도 한 그 무엇이었다
- p19
툭,
건드려보는 수작이다
감나무가 땅바닥에 홍시를 툭,
던지는 것도
덩치 큰 아파트 옆구리에 주먹을 툭,
질러 보는 겨울바람도
애먼 강아지를 자발없이 툭,
걷어차는 발길질도
알고 보면
대답이 그리워 그러는 것이다
나, 어떠냐고
툭,
말 거는 중인 것이다
- p23
저 남자는 한다
날씨는 춥고
왕복 8차선 횡단보도 앞에서
서른 초반쯤의 키 큰 남자가 혼자 울고 섰다
버스 안에서도 들릴 만큼 앙앙
큰 소리로 울고 있다
종이가방이랑 배부른 비닐봉지 한 손에 잔뜩 그러쥐고
한 손은 비어있다
오후 세시
이따금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이 힐끗거릴 뿐
누구 하나 다가서지 않는데
앞만 보고 하늘만 보고 소리쳐 우는 남자
기이한 일이라고
승객들은 저마다의 추측을 들었다 놓는다
누구라도
저렇게 울고 싶을 때 없었을까
우쭐우쭐 어깨들이 키재기 하는 빌딩 숲속에서
잡고 있던 손을 놓쳤거나
손 잡아줄 누군가가 간절해서
저렇게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었을까
다들 못 하는데, 저 남자는 한다
- p32 ~ 33
비눗방울
똑, 똑, 똑,
그리움이라 노크했는데요
꽃송이 송이 허공이
설렘이라 웃어보였어요
감았다 뜨는 눈꺼풀 사이로
줄기도 없이 뿌리도 없이 홀연히 피어
한순간 가슴까지 번지는 파문
눈으로는 잡아도
손으로는 잡히지 않는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가볍게 설파하고는
이내 몸짓을 풀어버리는 꽃
오고 간 흔적 없이
이전으로 돌아온 막막한 허공이
잠시 낯설었습니다
- p50
古典劇, 동백
뜨거운 가슴은 타고난 배역이었다
타올라야 사는 불꽃이었으니
핏빛 입술을 열고
목젖이 샛노랗게 고음으로 노래하는
카르멘 혹은 카추샤
절정의 순간에 목을 꺾는 사랑이었다
절명의 순간에도
사랑밖엔 모른다고 높은음자리에서 내던지는 몸
바닥이 벌떡 일어나 받아낸다
기립 박수하는 손바닥에서 피는 꽃송이 송이
객석으로 번지는 불길이 벌겋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뜨거운 연기력에
입 다물 줄 모르는 관객
연년이 보고도 또 보고 싶은 고전극이다
- p85
팔순이신 김계반 시인. 시인 앞에서 시간은 저 혼자 흘렀나 봅니다. 시마다 감성이 꽃처럼 피어나고 비유들은 꺼지지 않는 불꽃같습니다. 시어들은 별을 따다 만드셨을까요. 별을 따서 풀무질을 하고 담금질을 하고 오래 벼리고 벼려서 만드셨을까요. 시를 읽을 때면 늘 드는 생각. 슬픔은 슬픔대로 사랑은 사랑대로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어쩌면 그렇게 그릇들이 제각각이면서도 또 딱 알맞은지. 언어의 연금술사들입니다.
시인만이 가진 연륜들이 묻어나는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나이를 먹어야지만 알아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은 시간을 꾸역꾸역 쌓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되더군요. 내 나이 팔순이 되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를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아주 오래전, 국어선생님을 보면서 늙어도 감성은 잃지 않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주 지난 후의 나는 어떨까 스스로도 궁금해집니다. 나만의 그림이 만들어져 있을까요.
이번에도 여지없이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쉼표가 있는 자리 그 어디라도 여백에는 감탄사를 박아 놓았습니다.
종일 비와 바람과 시와 함께 머물렀던 시간들. 감성을 꼼지락댈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