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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Feb 03. 2022

아이러니 너 이은희 시집

책이 있는 공간



이은희 시인이 윤동주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가 있다. '영혼의 순수함' 때문이었고 누구도 모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 자신이 소망하는 것은 "지혜로워서" "모함에 걸려드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는" 윤동주처럼 되는 것이다.

                      쉬운 시에 깃든, 행복한 삶에 대한 꿈 - 이승하(시인 / 중앙대 교수)의 해설 중에서

 






아파트 뒷길. 나름 지름길이라고 내맘대로 명명한. 그 짧은 길의 어제와 닮은 집 담벼락에는 매화나무 한그루가 서있습니다. 누가 보던 보지않던 늘 그자리에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입니다.


이 길을 들고 난 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그 매화나무를 발견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몇 해전 이른 봄날. 무심한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그날의 흐드러진 매화꽃을 기억합니다.

그때도 감탄사보다 빨리 보아주지 못한 내 성정에 잔소리를 수없이 궁시렁댔던, 미안함이 발보다 먼저 다가갔던 날이었지요.


오늘, 그 길을 걸으며 잠시 멈추어서서 찬찬히 온몸 구석구석 눈쓰담을 했습니다. 아직 꽃은 피우지 않았지만 곧 피어날 새순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니 서둘지 말고 찬찬히 눈을 떠달라고 말입니다.



도서관 가는 길. 버스 정류장에서 바라본 거리는 정물처럼 멈춘 듯 텅 비어있었고 황량한 배경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치 추억 같은 사진 속에 저만 서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같은 동네 같은 버스 같은 장소들이 눈이 닿는 곳마다 같은 인사를 다르게 내게 보내왔습니다. 오늘도 반갑다고. 오늘은 어제랑 닮았을 뿐 어제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도 어제의 너가 아니라고. 그렇게 속닥이면서 말입니다.







바람향 자유를 꿈꾸며


머무르고 싶을 땐 머물었다가

떠나고 싶을 땐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아마도 향이 있다면 하늘향이었을 바람


어두운 창가엔 그 바람만 자유로이 분다

이 밤, 마음이 서글픔은

그대 곁에 있지 않아서가 아니요

내 마음 자유롭고 싶은 까닭이다.

p 21






그대


그대 나에게

항시 맑은 하늘입니다

나 그대에게

항시 새하얀 구름입니다

그대 위에 떠가는

하얀 돛단배

그대라는 강물 타고

그대라는 향기에 젖어


오늘도 나, 그대 타고

맑은 하루 여행 떠납니다.

p 37






어쩜, 우리는


바람,

한 움큼 손에

쥐어본다


보드랍고

상큼한 한 줌

바람!


주먹을 아무리

세게 쥐어 봐도

바람은

그 작은 틈새로

흔적 없이 사라지고


어쩜,

우리는

그런 바람 같은 것을

잡으려고

오늘을 살고 있을까?

p 65






지나버린 것은 아무것도 날 슬프게 할 수 없다


야금야금 생각을 옥죄고

스멀스멀 자유를 탐하는

그들, 태초 뱀의 후손에게 순순히 물러서는 일은 없다


어떤 날은 커다란 철옹성 같던 내면의 자아가

어떤 날은 존재감 없이 허물어질 모래성 같더라도

종국엔 그 어느 접점에 타협하는

그러나 그래도

지나버린 것은 아무것도 날 아프게 할 수 없다


스멀스멀 두피에 딱 붙어 야금야금 내 머릿속 진득한 피 맛을 본 그들일지언정

현재를 살지 않는 지나버린 그 어느 것도 내 자아를 쪼개어 가질 수 없다


깊은 곳, 작은 흠집 한 점 낼 수 없다.

로!

p 80 ~ 81





순純(수粹)


세상에 빛나는 건 둘일 순純(수粹) 없나보다(없다)

햇살이 눈부셔 다른(바로) 사람(널)은 볼 수 없다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리자 그(너)가 보인다.

p 128





시인의 말처럼 시들은 어렵지 않으면서 잔잔합니다. 윤동주 시인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존경해서 시인이 되셨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윤동주 시인의 시를 한편도 읽지 않은 이는 없겠지요. 하다못해 교과서에도 실려있으니까요. 저 또한 윤동주의 시를 읽고 외우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만큼 윤동주 시인을 존경합니다. '백석' 시인을 비롯해 가장 좋아하는 시인들 중의 한 분입니다.



이은희 시인의 그 마음들이 오롯이 전해지는 시들입니다. 상실의 아픔과 그리움을 담은 시는 조금은 다른 상실일지라도 그 슬픔은 못내 서러움으로 가슴속에 깊이 박혔습니다.


겨울바다 같은 쓸쓸함, 저 혼자 식어가는 커피 같은 외로움, 세상을 다 채워도 언제나 샘솟는 샘물같은 자식에 대한 사랑 등 때로는 미소를 때로는 눅진한 먹먹함을 때로는 따뜻함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시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볕이 들고 어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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