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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Mar 11. 2022

셀카와 자화상  이운진 시집

책이 있는 공간 210311




이 시집의 글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래전 아무도 다독이지 않았던 내 마음들을 조용히 포옹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소녀였던 나처럼 나무를 안고 우는 이가 있다면 먼저 지나간 내 그림자에 마음을 기대어 보라고 귓속말을 해주고 싶었다. 내가 가장 애틋하게 간직한 기억들이 서툰 위로의 말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는 동안 마음은 또 오래 견딜 힘을 얻을지도 모르니까. 우리 안에는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 에필로그 중에서

 






따뜻하고 명랑한 슬픔에 관한 이야기.



이 시집은 청소년을 위한 시집인가 보아.

이운진 작가가 자신의 십 대였던 시절에 위로를 보내면서 지금 십 대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도 토닥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펴낸 시집인 것 같거든.








작은 잔소리 하나에도, 작은 충고 한마디에도 부르르 온몸을 팔딱이며 예민했던 그때.

눈물이 많고 웃음도 많고 화도 많았던 그때.

하얀색이든 까만색이든 거짓말도 부끄럼 없이 그냥 침 뱉듯 뱉어내고 짜증도 솟구치면 그냥 마구 쏟아내고.

누군가 건드리면 온 몸에 되지도 않는 분기탱천으로 갑옷을 입고 벼린 날을 세웠던, 알량한 자존심 하나는 지키고 싶었던 그때.

나의 고딩시절 십 대 후반부가 그랬던 것 같아.

터질 듯 아슬아슬하게 부푼 풍선처럼, 손톱만 닿아도 팡 터질 것 같던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날카롭고 빵빵했던 때.






셀카와 자화상은 십 대들이 읽어보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은 시집이야.

'셀카'라는 단어가 태어난 지 몇 해나 되었더라. 곰곰 생각해보니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나의 그때는 없었던 단어거든.


지금은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이, 나의 십 대 때는 없었던 것들이 많아. 반면에 나의 십 대 때도 있었고, 지금의 십 대들에게도 있는 것들 또한 많지. 세상에는 변하는 것도 많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도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는 것이 더뎌 띄엄띄엄 걸어도, 앞서 걷는 사람이 손을 내밀어 주고 뒤에서 걷는 사람이 손을 잡아주면서 그렇게 같이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때도 지금도 걸음이 느렸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괜찮다는 말속에는
괜찮지 않은 게 절반 이상이다

괜찮아 보여야 하니까
괜찮아 보이고 싶어서
혹은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누군가
젖은 쪽 얼굴을 돌리며 괜찮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우물 속보다 서늘해지고

괜찮다는 말은
아픔과 슬픔을 누르느라 무거워진다

가장 맑은 햇살에 두 눈을 말리며 하는 말
독기 품은 가시를 잘라낸 말

불덩어리를 삼키듯
울음을 삼키며
자꾸자꾸 생각하면

때로는
묘약처럼 마음을 세워주는 썩 괜찮은 말이다

 

스스로가 힘들 다고 느껴질 때 자신에게 건네는 한마디.

누군가 힘들다고 말하면 어깨를 툭치며 건넬 수 있는 한마디.

괜찮다.

썩 괜찮은 말이긴 하다만 눌러 담은 괜찮지 않은 것들은 그대로 정말 괜찮을까.





시간이 한 일

히말라야산맥을 옮기거나
나일강의 물길을 북극으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내 마음도 그럴 줄 알았다

미움은 내내 밉고
슬픔은 내내 울고
사랑은 영원히 떨려서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미움은 슬픔이 되고
슬픔은 온기가 되고
사랑은 사라졌다가 기억으로만 나타났다

애드벌룬 같은 소문들
거짓말처럼
이슬 한 방울만 한 사건이 되었다


시간은 가만히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제 할 일을 해.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와. 십 대가 쌓여서 이십 대를 오게 하고, 이십 대가 쌓여서 삼십 대를 오게 하고......

시간은 아무리 큰 일이라도 지나고 나면 작은 일로 기억되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졌어.






간격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도록
구름과 구름이 흩어져 있는 만큼

서로의 그늘을 밟지 않도록
나무와 나무가 떨어져 서 있는 만큼

아무도 잴 수 없지만
빗줄기와 빗줄기 사이만큼

너와 나
마음과 마음도
간격이 있어야겠다

보이기 싫은 눈물을 감출 수 있을 만큼
가끔은 미워하는 소리가 들릴락말락할
꼭 그만큼만


알잖아. 간격이 없으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거. 가까우면 더 가깝고 싶은 거. 그러다 어느 순간 부딪치는 거. 부딪치면 더 멀어지는 거. 누군가 넌 이만큼 만이라고 선이라도 그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선이 그어진다면, 딱딱 줄 맞추는 것처럼 간격이 지켜질 수는 있을까.

너와 나 사이의 간격이 얼만큼인지 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좋겠어. 너와 나사이의 떨어진 간격 그 틈 안에서 너 모르게 울 수 있다면 너에게는 언제나 웃는 모습만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시험 전야'라는 시는 기가 막히게 나의 십 대와 똑같았어. 읽으면서 나도 그랬지 했다니까. 시험 전날 벼락치기한답시고 불을 환하게 밝혀둔 채 잠이 들어 아침에 일어나 엄마한테 혼난 일. 친구들과 함께 밤샘 공부한답시고 모여서는 온갖 군것질거리 먹으면서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공부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냈던 일. 그때는 재잘재잘 할 이야기도 어쩜 그리 많았을까. 학원비 내놓고 맨날 빼먹었던 일. 독서실 끊어 놓고 잠만 잤던 일. 그때는 왜 그렇게 시간 소중한 줄 모르고 살았을까. 물론 지금도 잘 다고 할 순 없지만.

폭풍처럼 그 시절의 기억들이 거세게 나를 몰아치는 밤이다.


'셀카와 자화상'.

셀카도 나의 모습이고 자화상도 나의 모습인데 왜 셀카와 자화상 사이의 '와'의 간격만큼 거리가 느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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