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자 Mar 05. 2022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집

책이 있는 공간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 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 번 더 사는 일. 이런 마음먹기를 흔히 '작정作定'이라고 하지만, '작정作情'이라고 바꿔 적어본다. 돌봄을 위한 작정, 그것이 박준의 사랑이다.
                  발문 - 조금 먼저 사는 사람 중에서(신형철 문학평론가)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p9





종암동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p72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이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오고 '밥'이나 '우리'나 '엄마' 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 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p79


 




아주 가끔

물소리에 잠을 깹니다. 어둠 속에서 귀만 열린 채로 물소리를 듣다 보면 똑똑똑 다들 잠들 때 홀로 잠들지 못한 물방울의 뒤척임이 전해져 옵니다. 16층에서 듣는 물의 불면의 소리는 20층짜리 건물의 어디쯤에서 오는 걸까요. 아주 가끔 그 물소리와 나는 함께 밤을 새웁니다.



'박준'시인의 시는 '삼월의 나무'이후 처음입니다. 도서관에 가서 시집을 빌릴 때면 얇은 책들이 나란히 다른 이름을 걸고 꽂혀있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시인들의 벼리고 벼린 문장들이 알알이 박혀있을 책들이 외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 꺼내온 시집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입니다.


책의 제목은 실려있는 시 '장마'의 한 부분입니다.



시들은 운문의 형태와 산문의 형태로 쓴 시들이 적당히 섞여있고 짧은 시와 긴 시가 섞여있습니다. 문장들은 알맞게 익은 밥알같이 달큰하기도 하지만 설익은 밥알같이 서걱대기도 합니다. 지난날을 데려와 오늘에 상을 차리고, 올 날을 찬으로 얹어놓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시들에 '이야기'가 있어 저는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제 사심입니다. 박준 시인은 이야기꾼일까요. 그저 스쳐가는 일상도 이야기가 되어 문장 속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마침표가 전혀 없는 시. 시의 끝부분에서 오래 바라봅니다. 왠지 더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오래 머물러있는 듯 보입니다. 그 바람이 남긴 자국들은 가슴에도 바람을 들게 합니다.



시들은 바닥에 쓸쓸함이 깔려있어, 그 쓸쓸함 위에 러그를 펴고 앉아 구름에 밀려나 시무룩해진 해를 만나는 느낌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읽으면 또 바뀔지도 모르는 생각입니다.




어젯밤 이곳은 바람이 마실을 갔었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소란한 친구들을 몰고 돌아왔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