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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Mar 02. 2022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문태준 산문집

책이 있는 공간  220301


문장을 얻는다는 것은 새로운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잔물결처럼 흔들리거나 안개처럼 흐릿하던 어떤 것이 마침내 형상을 얻는다는 뜻이다. 마치 눈 뭉치를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어 세우듯이. 마치 흙 속에 숨 쉬던 검은 빛의 씨앗이 발아를 통해 흙 위의 푸른 빛으로 바뀌어 나타나듯이. 문장을 얻으려는 때에는 좋은 예감이 있고, 흥이 있다. 건반이나 현을 통해 음악이 세상으로 나오려는 순간처럼. 그러므로 문장을 얻는 일을 기쁘게 여겨 계속하게 된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얼마 만이었을까.

일어나 보니 도시가 젖어 있었다. 밤을 틈 타 내린 건지 아니면 새벽에 내린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늦은 잠 때문에 늦은 기상이었고, 오랜만의 다디단 잠이었으니까. 깨고 나면 기억하지 못하는 꿈처럼 그 안에서 내렸을까.

빗소리의 경쾌함을 고대했던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비는 냄새만 폴폴 날리고 떠난 느낌이라 아쉽고도 아쉬운 날이었다.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는 시인 '문태준'의 에세이, 산문집이다. 현재 제주 애월읍에서 살고 있는 저자의, 일상 속에서 만나는 소소한 단상들과 책에서 만났던 시와 문장들을 엮어서 묶은 책이다.

불교의 경전이나 윤동주를 비롯한 정지용, 김남조, 최하림, 김용택 등 많은 시인들의 명시들, 그리고 옛 선인들의 문장들이 곳곳에 섞여들어 저자의 이야기에 더 깊은 색깔을 입혔다.

시인은 자연을 닮아있다. 그의 글 속에는 바람, 하늘, 구름, 바다, 달, 별, 물, 돌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그냥 스쳐가지 않고 오래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거기다가 계절의 옷을 입혀놓으니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그것에 빗대어진 삶에 대한 통찰은 글을 읽는 우리에게 한 번 더 문장들을 바라보게 만들고 오래 머물러 있게 한다. 인연도 없이 그저 스쳐지나기에 급급했던 풍경들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지난날 그랬지 했던 숨어있던 기억들을 불러오게도 한다.

무엇을 바라보든 따뜻한 시선을 담아 눈 맞춤을 하고 그 눈 맞춤은 마음에까지 닿아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인용된 수많은 시와 문장들에서 만나는 감정들은 깊이 숨겨있던 마음의 갈피들을 들춰보게 하고 저자의 문장들은 들춰진 마음자리를 쓱쓱 닦아내고 정리하고 다시 채우고를 반복하게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항아리'에 대한 글이었다. 어느 하나 사람이 사는 세상과 닮지 않은 것이 있으랴.

하지만 항아리에 담긴 우주는 두근두근 설레는 첫 만남이어서일까. 그 항아리에 담긴 우주의 메아리들을 듣고 싶어지고 그 항아리에 담긴 모든 속삭임들을 들여다보고 싶어지게 했다.

현실이 아플 때 우리를 위로하는 것들은 아주 작은 것들이다. 마음을 다독이는 것 또한 그렇다.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이마를 덥히는 따스한 햇살 한 줌, 새파란 하늘, 초록의 냄새, 말랑한 흙 한 움큼 따위들이 눈물 대신 미소를 주기도 하니까.

책 또한 마찬가지. 책 속의 한 줄 문장 만으로도 하루를 충만하게 보낼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다.

이 책은 그저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눈을 반짝이게 되는 문장들이 많이 숨어있다. 자신에게 오는 그 문장들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본문 중에서


시작을 위해서는 튼튼한 작심이 함께 필요하다.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자신의 내면에 가득 불어넣어야 한다. 모든 것은 마음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마치 달이 구름으로부터 빠져나오듯이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미래의 좋은 일은 현재의 밝은 내면의 뿌리에서 잉태되는 까닭이다. 스스로를 굳게 믿지 않으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p 54  봄 - 시작하는 때에 남풍이 불어오네 

돌담을 가만히 보거나 돌담을 쌓다 보면 보석寶石이 따로 있거나 한낱 돌멩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하나의 돌마다 오랜 시간이 숨 쉬고 있고, 갖은 풍상이 들어 있고, 고독과 견딤이 함께 있다. 그러므로 돌은 우리 인간의 초상이기도 할 터이다. 개개의 인격들이 모여 더 큰 범위의 모임과 관계를 만들어가듯이 개개의 돌들도 모여 원담을 이루고, 잣성을 완성하고, 집담과 밭담이 되는 것이다.

p 120  여름 - 제주 밭담 

'수일불이守一不移'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물건을 오롯하게 응시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략

무언가를 응시하는 일은 평정된 내면에 이르게 한다.  평온을 찾은 사람이 되게 한다. 평정된 내면에 이르게 되면 바깥과 안쪽, 대상과 내심, 남과 내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응시하면 대상이 소상히 보이고, 이해하게 되고, 대상이 가진 이점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은 내 마음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응시하면 내면의 눈이 그윽해진다. 조용하게 들으면 내면의 귀가 커진다.

p 204  ~ 205  가을 - 풍경과 응시 

항아리는 하나의 우주에 견줄 만했다. 항아리에는 고운 햇살이 담기고, 바람이 들어가고, 빗방울과 눈송이가 담긴다. 닭과 꿩이 우는소리와, 강아지가 짖는 소리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환호의 음성이 함께 담긴다. 물이 쌓여서는 하늘을 담아내고, 이동하는 구름을 수면에 비쳐 보인다. 바람이 격렬하게 회오리처럼 돌다 나가는 때가 있고, 땡볕에 항아리 속이 끓을 때가 있고, 혼자 달빛을 받으며 가을밤에 쓸쓸히 앉아 있는 때도 있다. 그러므로 이 항아리는 하나의 우주요, 또 어느 때에는 내 마음도 이 항아리와 같아 보여서 내면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p 261 ~262  겨울 - 항아리 2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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