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나는 어느 곳이건 밤하늘에 수놓아지는 불꽃놀이보다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하네. 푸른색, 초록색 빛의 알맹이들이 어둠 속으로 솟아오르는 거야. 그리고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한 순간, 작은 호선을 그리면서 사라지는 거지.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기쁨과 동시에 저것이 곧 사라져버리겠구나, 하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일세. 이 두 가지 감정이 연계되어 있기에 영속하는 존재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끼는 게 아닐까? 어떤가?
- 크눌프에 대한 회상 중에서 -
이른 봄
방랑자인 크눌프가 이른 봄 병원 신세를 졌다가 퇴원 후 레히슈테텐에 사는 친구, 피혁공인 에밀 로트푸스 집에 방문한다. 로트푸스와 그의 아내는 그를 흔쾌히 반겨주며 따뜻하게 대해준다. 크눌프는 그곳에서 며칠 몸을 의탁하면서 마을을 구경하고 지인들도 만난다. 로트푸스의 아내는 크눌프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며 호의적으로 대한다. 크눌프는 그녀의 호의가 부담스러워서 빨리 그곳을 떠나려 한다. 떠나기 전날, 맞은편 집에 사는 하녀 베르벨레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가 그녀와 짧은 데이트를 한다. 다음날 새벽 그는 그곳을 떠난다.
크눌프에 대한 회상
태양이 작열하던 여름날, 젊은 시절의 나는 크눌프와 방랑의 동행자로 함께 했었다. 어느 날 오후 한 공동묘지를 지나가다 그곳으로 담을 넘어 들어가서 쉬어가게 되었다. 공동묘지를 곁에 두고 우리는 그곳에서 해가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잠에 들었다. 크눌프는 자신이 꾸었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익숙했다가도 낯설어지던 고향 마을. 자신이 사랑했던 헨리에테와 리자베트를 보았지만 그녀들은 그를 외면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 변해버린 고향마을. 그는 그 속에서 이미 이방인 이었다.'
다음날 잠에서 깬 크눌프는 몹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기분은 나에게도 전염되어 종일 들떴었다. 그날 저녁엔 마을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크눌프는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떠났고,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나는 오래 술집에 남아있었다. 늦게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고 있었다. 다음날 오랜만의 숙취로 햇살이 비치는 늦은 시간 잠에서 깨어보니 그는 떠나고 없었다. 나는 외톨이가 되어 그가 말한 모든 인간은 고독 속에 산다는 말을 곱씹으며 고독을 맛보게 되었다.
종말
10월 어느 맑은 가을날, 블라흐로 가는 국도 위를 마홀트의 마차가 달리고 있다가, 우연히 스쳐가는 사람을 만나는데 자세히 보니 그는 크눌프였다. 유년시절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친구였던 서로. 사십이 넘은 지금 그 둘은 그렇게 만났다. 그런데 이즈음 크눌프는 폐병에 걸려 병색이 깊은 상태였다. 크눌프는 자신의 고향인 게르버자우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마홀트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음식과 포도주를 대접하며 요양원을 알아봐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라틴어학교에 성실히 잘 다니던 똑똑하고 영리했던 크눌프가 왜 일반학교로 전학을 갔는지 그 이유를 마홀트가 묻게 되고 크눌프는 여태껏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그 이유에 대해 털어놓는다.
크눌프는 오직 게르버자우로 가고자 하는 일념뿐이었기에 마홀트에게 요양원을 가야 한다면 게르버자우에 있는 요양원으로 알아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피곤하고 쇠약해진 몸을 쉬었다가 옷과 장화를 다듬고 면도까지 한 후 다음날 마차를 얻어타고 게르버자우로 향하지만 크눌프는 병원으로 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죽기 전에 꼭 할 일이 있었다. 유년시절의 자신의 기억이 배어있던 곳, 프란치스카, 부모님의 정원까지 샅샅이 돌아보고 친구도 만난다. 날이 추워지고 눈이 내리는 때에도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안타까워했다.
하얀 눈 속에서 죽음은 점점 임박해오고, 크눌프는 환각 속에서 신과의 대화를 나눈다. 후회, 분노, 연민까지 신에게 쏟아내는 크눌프. 그렇게 쏟아내고 신과 대화하면서 비로소 자신과 화해하는 그.
크눌프는, 1915년에 발표된 헤르만 헤세의 단편소설이다.
그의 이야기를 '이른 봄', 크눌프에 대한 회상', '종말'이라는 세 편의 이야기로 구성했다. 계절적으로는 이른 봄의 봄, 크눌프에 대한 회상의 여름, 종말의 가을, 겨울이 배경이다. 한곳에 정착되지 않고 방랑의 생활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크눌프. 봄처럼 빛나고 당당했던 그, 깊은 여름의 어느 날은 마치 철학자처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초연해졌다. 오랜 방랑의 생활로 병을 얻은 후의 그의 가을과 겨울은 무성하게 푸르렀던 옷을 벗고 순백의 눈 속에서 눈부신 태양을 보며 마지막 삶을 돌아보게 된다.
어린 시절, 프란치스카를 알게 되면서 오로지 그녀만을 바라보았던 크눌프. 그녀를 얻기 위해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학교도 옮겼지만 그녀에게 배신당하는 크눌프. 그의 최초의 사랑에 대한 상처와 상실. 그렇게 방랑의 길을 선택했던 그의 삶은 길 위에서 끝이 난다. 죽음 앞에서 다시 찾은 유년의 고향. 다른 그의 삶들 보다 가장 강력했던 그 시절과 다시 조우함. 무엇을 얻고 싶었을까. 죽음 앞에서의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반성, 분노, 절규..... 가시처럼 파고드는 안타까움은 몹시도 나를 아프게 했다.
누구나 그렇듯 인생에는 봄같이 활짝 피는 순간도 있고,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순간도 있고, 체념의 순간도 있다. 좋은 날만 있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크눌프가 방랑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철저히 혼자였고, 지독한 고독 속에 몸부림치며 살았다 해도, 그 끝이 너무나 외로움에 사무친다 해도 빛났던 순간도 있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꽃놀이 같은 삶이라 할지라도 종내에는 허무만 남는다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공평한 끝의 시간에는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만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했던 시간을 기억하며 유한한 시간 동안 잘 살았노라고 겸허히 끝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의 성장기와 방랑기, 그리고 귀향기까지 모두 녹아있는 소설. 머릿속 깊은 곳에서는 수많은 글자들이 얽히고설킨 상태로 꽉 차 있고, 가슴 안에서는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데, 글로 적어지지가 않는다.
주옥같은 글귀들이 꽉 차 있는 소설. 빛나는 상념, 처절한 고통, 아름다운 풍경, 고독. 소리 내어 울어버린 종말 편에서 나는 왜 울었을까를 글로 적을 단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여운이 내 발끝에 매달려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것일세. 어떤 영혼도 다른 영혼과 섞일 수가 없어. 두 사람이 함께 다니고, 함께 이야기하고,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 그러나 각자의 영혼은 꽃과 같아서 자기 자리에 뿌리를 박고 있다네.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가 없는 거야. 그랬다간 뿌리를 떠나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하겠나? 꽃들은 서로 좋아할 경우 향기와 씨앗을 보내주지. 하지만 씨앗이 올바른 자리에 당도할 것인지는 꽃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걸세. 그걸 해주는 건 바람이거든. 그리고 바람이란 이리저리 제멋대로 불어대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