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에세이] 내가 겪은 일들.
지난밤에 걸려온 그와의 영상통화는 상당히 달콤했다.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말했다. ‘누나랑 와인을 좀 했어.’ 이야기를 대변하듯 내 화면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세병이나 마신 거치곤 멀쩡해 보였다. 내 애인은 아일랜드인이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현재 지구 반대편에서 거의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평소에도 보고 싶다면서 자주 감정을 표현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그는 수다쟁이였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쑥스러움이 많은 편인데, 술이 그의 이성을 살짝 마비시켰는지 그날은 폭풍우가 쏟아지듯 퍼부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그는 부모님에게 성 정체성을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그의 형과 누나들(아일랜드 가족답게 3명의 누나와 2명의 형이 있다)은 자연스럽게 눈치챘지만 굳이 이야기의 화두에 던지진 않았다. 그날 저녁은 그중에서도 가장 친한 작은 누나와 와인을 마셨다며 말하는 내내 미소를 더듬고 있었다. 그는 지난 일주일 동안 왜 혼자 끙끙 앓았는지 이야기했다. 나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고, 자기 가족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가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마치 다섯 살 아이가 엄마 몰래 과자 먹은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가 75세로 꽤 보수적인 시골 아저씨라는 게 걸린다고 꽤나 심각한 말투로 말했다. 작은 누나는 이미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고, 그날은 내 인스타그램을 묻더랬다. 평소 서로에 대한 사생활을 오픈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술기운을 빌어 못 이기는 척 보여줬다. 그녀는 쭉 훑어보더니 ‘되게 잘생겼네.’, ‘염색을 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갈색머리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일랜드는 언제 데리고 올 거야?’, ‘오고는 싶어 해?’ 등등. 꽤 오랫동안 심문을 당했다면서 웃어넘겼다.
나도 사귀는 2년간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놀랍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가끔은 벌어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혼자 생각했다. 우린 그렇게 두 시간을 통화했다. 사랑한다는 말과 일주일 뒤에 한국에 도착하면 며칠은 함께 있고 싶다면서, 날 보지도 않고 보내는 한 달은 지옥 같다고 칭얼댔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끊을 준비를 하는데 배터리가 다 됐는지 통화가 종료됐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잘 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책을 읽었는데, 10분 뒤에 다시 전화가 와서는 여전히 취한 목소리로 핸드폰에 대해 사과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잠들었다. 나는 살짝 미소를 더듬고 잘 준비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미안 어제 일은 기억이 하나도 안나. :-/ 너무 취해 있었어.
나는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무언인가? 어젯밤에 한 이야기가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기억이 안나는 걸까? 결론을 내리기 힘들었다. 어제 대화는 봄바람의 흩날리는 만개한 벚꽃나무 같은 건가. 아름다운 기억만 남고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난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성을 되찾고 그와 차분히 대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좀 해봤는데, 불확실한 게 몇 가지 있어.
그는 분위기를 읽었는지 읽자마자 전화했다. ‘무슨 일이야?’ 연결되자 그가 물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내가 이해한 바를 이야기했다. 그러다 내가 좀 한심한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억을 못 하는 사람에게 어젯밤 이야기를 근거로 내 생각을 설명하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기억이 없다는 사람한테 이렇게 말해서 뭐하나 싶어. 기분이 좀 상했거든’ 그는 ‘사실은 말이야.’로 시작하면서 천천히 억울한 듯 스스로를 변호했다. ‘물론 다 기억하지. 그냥 하는 말이었어. 오늘 아침에 누나랑도 장난스럽게 이야기했어, 기억 안 난다고. 사실은 다 기억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평소 나답지도 않고…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런 말이 있잖아. 취중진담이라고. 거짓말한 건 하나도 없어. 네가 그렇게 받아들일 줄 몰랐어. 미안해’ 그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마지막엔 용서를 구했다. 나는 조용히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생각했고 그동안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다. ‘그거 되게 무책임한 말인 거 알아?’ 나는 따지듯 물었다. 내 딴엔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조언도 해주면서 그의 선택에 동의한다고 공들여 보낸 어제의 두 시간의 대화 마치 없었다는 듯 무시돼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각 안 해봤는데, 네 말이 옳아. 그렇게 문자를 보냈으면 안 됐는데.’ 그의 사과는 진실함이 묻어 있었고, 나는 받아줬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