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같은 고독 속의 한 남자 이야기.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였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 1904~ 86)는 영국 출신이지만 베를린과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 싱글맨(A single man)을 쓰면서 작가가 거주했던 배경과 나이가 조지와 일치하는 것을 보아 자전적인 요소가 있어 보인다. 그는 당시 본인보다 스무 살 어린 와이스탄과 연애했다고 한다.
1962년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부흥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에겐 암흑기와도 같은 시기였다. 1950년대에서 60년대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합법인 시대였고, 게이를 대상으로 하는 술집들은 문을 닫거나 잦은 단속과 검문을 받아야 했다. 몇몇 경찰들은 이를 악용해 금전을 갈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성애자들은 자신이 이성애자들과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고 사회에 녹아들고 싶어 했다. 이러한 긴장은 그 골이 깊어져 결국 1969년 6월 28 뉴욕에서 스톤윌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항쟁은 동성애의 권리를 주장하는 거리행진이었고, 이것이 LGBT 퍼레이드의 시초가 된다.
주인공 조지는 영국인이고 영국 악센트를 사용한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미 해군인 짐과 동거를 하면서 행복한 날을 보냈다. 하지만 끔찍한 사고로 짐은 사망하게 되고, 조지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독거하고 있다. 소설은 조지의 하루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를 세세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 아침에 일어나 대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고 마트를 지나 옛 애인이자 친구인 샬럿과 술을 마시고 제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줄거리는 이 정도로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고독이다. 작품 전체에서 나타내고 있는 고독은 여러 면으로 설명이 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고독을 그린다. 고독이라는 다양한 빛이 조지라는 다이아몬드를 투과하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음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조지의 첫 번째 고독은 외부세계와 대응하는 내부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그는 영국인이기 때문에 미국인과 다른 악센트가 있다. 타인은 그런 그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끊임없이 그가 외국인임을 인지하도록 만든다. 강의실 안의 토레스 부인은 그의 억양이 매력적이라며 칭찬하지만 그건 ‘너와 우린 다르다.’고 선언하는 것이며, 조지 내면에 대한 관심보단 영국인이라는 데에 흥미를 두고 있다. 조지는 미국 사회 내에서 이민자의 신분으로 소수자에 속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완벽히 그 사회에 물들 수 없고 외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조지는 어디도 속하지 않은 이민자의 고독을 느끼며 매일을 살아간다.
두 번째, 조지의 나이는 58세이다. 나이테 같은 얼굴의 주름은 육체적인 젊음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젊음의 활기로 넘치는 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조지는 자신이 체력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름다움을 거의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출근길의 테니스장에서 젊은이들이 라켓을 들고, 땀 흘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에 조지는 완전히 매료되어 있고, 그들의 팔근육을 부러워하는 걸 보면서 우린 알 수 있다.
조지가 강의하는 티토누스의 전설에서 티토누스는 불멸의 축복은 받았으나 영원한 젊음은 선물 받지 못한 비운의 남자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 20대와 같은 마음과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늙어버린 외모로 인해 자신마저도 혐오해야 하는 비운의 남자 티토누스는 조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조지의 활력이 넘치는 자아는 늙은 육체에 갇혀있는 고독한 자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무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하는 성소수자로써 고독을 느낀다. 동성애자라는 단어는 당대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언급조차 불가능하다. 조지는 짐과 동거했다. 결혼을 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둘은 법적으로 엮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짐의 가족들은 그의 장례식에 조지를 초대하지 않았고, 조지는 예상한 듯 괜찮다는 말만 수화기로 전한다. 그의 존재는 부정당했으며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짐과 함께했던 집에서 혼자 생활하며,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텨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조지와 같은 고독한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하는데, 조지의 유일한 절친인 샬럿이다. 그녀의 본국 영국에서 만난 미군 남편과 결혼해서 이민을 왔다. 현재는 이혼한 상태이고 하나뿐인 아들마저 엄마의 집착에 못 이겨 집을 나간 듯 보인다. 운전면허증도 없고 요리도 못하며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은 층의 패션을 따르는 약간은 철부지 느낌이 나는 여인이다. 예전에 잠깐 연애했던 조지를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고, 언젠가 조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샬럿은 조지의 입에 혀까지 넣으며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에 조지는 사람의 접촉이 그리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샬럿이 그녀의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건지 정확한 이유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조지는 입술만 댄 채 가만히 있는다. 샬럿은 과거 남자였던 조지와 다시 잘 될 거라는 헛된 기대를 꿈꾸며, 자신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미국에 남아있는다.
조지는 죽은 애인을 애도하며 현재를 버티고 있다면, 샬럿은 게이가 되어버린 전 애인인 조지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이 둘의 고독은 서로 충동하며 작품 전체의 음울함을 배가 시킨다.
“지금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맨체스터 텔레비전 프로듀서인데, 집 내부를 거의 다 뜯어고쳤어. 계단을 새로 놓고, 욕실을 하나 더 넣고, 주방도 최신식으로 개조했어. 얼마 전에 연락이 왔는데, 중앙난방 장치도 달았대.”
“정말 끔찍해! 아름다운 고옥은 법으로 보호해야 해. 뭐든 신식으로 고치려고 혈안이 되다니, 영국 사람들도 이 끔찍한 미국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 (p.149)
미국에 살고 있는 영국인 조지와 샬럿이 나누는 대화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조지가 태어난 영국의 농가에 대해서 이야기인데, 그곳은 1649년에 지어진 농가이다. 오랜 세월 동안을 온갖 악조건 속에서 견뎌낸 집이지만, 현재는 외형은 보존됐지만 속은 완전히 리모델링됐다. 나는 이 집의 역사가 영국과 미국의 것처럼 보인다. 한때 대영제국은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하여 막대한 성공과 부를 누렸지만 미국의 독립과 세계대전 이후, 그 영광은 미국에 넘겨줘야 했다. 이제 이 집처럼 미국 땅의 영국인과 영국의 문화의 속은 미국적인 것으로 채워져 나갔다. 샬럿은 이 역사적인 집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도 미국적인 것에 굉장히 매료되어 있다.
이 둘의 상태도 상기한 고옥과 같은 처지이다. 샬럿은 영국으로 돌아가기 싫어한다. 이유는 단란하지 못했던 가족과의 과거가 싫고, 어디에나 있는 미국의 편의점과 마트가 그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의 자본주의 시장이 주는 삶의 안락함과 간편함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영국과 확실해 대비된다.
케니는 조지의 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현재 집을 나간 상태이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상태이다. 그리고 케니는 존댓말을 할 수 있는 아버지를 가지고 싶다는 희망을 조지에게 털어놓는다. 미국인 케니가 상징하는 것은 완전히 성숙하여 가장 아름다운 젊음을 향유하고 있는 미국이다. 그가 조지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신사의 상징인 영국식 억양과 정장을 차려입은 교수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존경할 수 있을 만한 보수적인 아버지 같은 인물이 케니는 조지라고 생각해서 조지가 자주 가는 술집에서 그를 기다리기도 한다. 역사가 길지 않은 미국에 필요한 것은 전통과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적인 것이다.
우리는 조지의 하루를 관찰하면서 그의 양가적인 감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미국인은 매너가 없고 야만적이지만, 그는 그런 오만함과 패기에 매혹되면서도 두려워한다. 조지가 마트에서 본 히스패닉계의 몸 파는 청년을 보고 느끼는 야성적이고 거침없는 끌림처럼 말이다. 작가는 어떤 게 옮고 그른지 가치판단을 배제한 체 끊임없이 독자에게 상황을 제시한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한때 찬란했지만 이제는 늙어버린 육체에 갇힌 조지의 눈을 통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