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책 리뷰] 추락(2)

용서란 무엇인가?

by 혜성

용서


원시시대의 씨족사회에서부터 현대의 거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혼자서 생존하는 방법보다 공동체 생활로 뭉쳐서 생활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렇게 진화해 왔다. 한 개인은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 하고 고립되길 진화적으로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서는 다수가 영위하는 공동체를 잘 관리하기 위해 법과 같은 규율들을 만들어 왔고 지키지 않을 시, 마을이나 성 밖으로 추방하는 방법에서부터 감옥에 억지로 가둬서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이나 목숨을 빼앗는 잔혹한 방법까지 다양하다. 서로 다른 개인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보니, 개인이 개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상황들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그러면 우린 용서를 하고 새롭게 시작하거나 아니면 복수를 하여 피해자에게 갚아주는 방법(그것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 내의 개인이 해산이나 파멸로 이르지 않고 가장 원만한 해결하는 방법은 용서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함께 잘 살기’를 기초로 집단을 꾸려 나간다고 하다면, 우리는 규칙, 교훈이나 윤리와 법을 결정해야 하야만 하고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화합과 합의가 잘된 하모니가 잘 맞는 합주와 같이 쉬는 일이 절대 아님을 거듭 강조한다. 이것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이기도 하지만 ‘평화’를 향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데리다의 주장은 상당히 추상적이면서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도 같지만, 우리의 이상향 속에서나 추구할 수 있는 목표의 최고치를 제시하고 그곳을 향해 나가는 것의 중요함을 지적하는 좋은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찰스 그리스월드(Charles Griswold)의 주장으로는, 용서란 분노의 중화나 복수에 대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벌이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그가 주장하는 용서는 유대, 기독교 전통에 기반해 있는 전통적 관점이며, 용서는 받기 위해서 몇 가지 기본 조건이 따라온다. 일단, 자기의 책임을 인정하고 문제가 된 행위와 그 행위자인 자신을 비판하며 피해를 불러일으킴에 대한 후회의 표현이 필요하고, 앞으로는 그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을 말은 물론이고 행동으로 보여야 하며, 피해자의 관점에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전통적이고 성서에서 나오는 용서의 관점은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만 관심을 보인다. 이것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일대일의 이분법적 사고 이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의 사회와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그 관한 과거의 윤리들도 함께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수학 계산처럼 맞아떨어지지 않는 이러한 문제는 시간의 흐름과 권력자의 힘에 의해 겹겹이 쌓여 그 깊숙한 속을 보기 정말 어렵게 만든다.


1막의 데이비드는 멜라니와 관계를 맺는다. 이들의 섹스는 단순히 두 명의 남녀가 애정을 나누는 단순한 문제로 멈출 수 없다. 50대 백인 남성과 20대 초반의 여성 관계는 그 둘 사이에서 비밀리에 이뤄졌으면 괜찮았지만 공식화되어 사회적으로 회자되는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눈에서 재단되고 지적을 받아야 하는 일로 확장되었다.


일단 50대 교수와 20대 제자라는 계급이란 측면에서 보면 힘의 균형은 기울어진 상태이다. 학생이라는 직급을 가진 입장에서 진보적 지식인인 교수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음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리 두 사람의 동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규율의 논리를 알고 있는 교수는 이를 중재했어야 했다. 또한, 한 번의 실수가 아닌 연속적으로 다른 이들과 관계를 지속했다는 데에서 그의 의도는 매우 불순했다. 그 때문에 데이비드도 그것이 불순한 관계라는 것에 대해 위원회에 인정했다.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위원회와의 만남 전까지 그는 자신의 가해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위원회 만남 후에도 가해자 데이비드와 피해자 멜라니 사이에서 멜라니의 아버지와 대학 위원회가 두 사람의 소통을 막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리스월드가 말한 용서와 종교적 용서의 조건은 성립되지 않는다. 데이비드가 위원회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죄를 몰랐고, 피해자의 존재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용서를 빌 수조차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빌지 않은 인물이 아니기에 유죄 선언을 유보한다. 후자의 문제를 보자면, 데리다는 “TO FORGIVE”에서 되돌릴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것의 피해자가 중개인 없이 일대일로 마주한 조건에서 용서를 빌거나 용서를 해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가해자는 진심으로 뉘우쳤고 이를 피해자에게 언급함으로써 용서를 구하는 행위로써 가장 순수한 상태의 용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을 박탈하고 아무 상관없는 공공기관 아래에 이뤄지는 용서는 그 경험을 굉장히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주장한다. 가해자는 순수한 회개의 감정이 박탈되고, 감옥으로 가는 것이 무서워서 용서를 구하는 꼴이 돼 버릴 수도 있다. 용서의 기회를 찾음과 동시에 그 기회를 박탈당했고,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고백과 용서가 아닌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차단을 위한 수습만 있어 보인다.


2막에서 데이비드는 후에 멜라니를 찾아가 용서를 빌지 않으며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후에 그 아버지의 초대에 의해 찾아간 멜라니의 집엔 멜라니를 제외하고 나머지 가족들이 있다. 그가 무릎을 꿇고 멜라니의 가족들이 입은 피해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뉘우친다고 하더라도 ‘진정성 있는 고백’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녀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학교에서 사직당하고 딸에게 찾아간 뒤에는 어땠나? 데이비드는 자신이 멜라니에게 한 일들에 대한 회상이나 죄책감은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이 독자인 우리가 데이비드의 편에 서기 힘들게 하는 점일 것이다. 루시가 집단 강간을 당한 이후로 데이비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성적이고 상식적으로 그녀가 이 농촌에서의 생활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여 이사를 요구하지만, 그녀는 거부한다. 이곳에선 1막과 아주 비슷하게 가해자인 흑인 남성들의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없이 미래의 사건에 대비만 있을 뿐이다.


언어학자, 정신분석학자,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데리다의 용서 철학보다 현실에 맞닿아 있으며 굉장히 현실적인 면모가 있음에도 용서는 사적인 영역이어야 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야기하고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용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고통받는 환자의 트라우마에 무의미를 넘는 의미를 부여하면, 용서받은 주체가 새 삶을 찾고, 환자가 다시 태어나는 데 힘이 되어 준다고 주장한다. 과거는 지울 수 없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용서를 받는 자와 하는 자들이 새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용서의 궁극적인 목표이라고 말한다.


피해자인 루시는 강간의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으며(독신 여성으로 혼자 외딴곳에 사는 책임), 옆집 흑인과 결혼하면 다른 흑인들이 다시는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트라우마를 밝히고 피해자에게 사과를 직접 요구하기보다 죄책감을 안고 사건을 무시하는 것을 선택한 루시와 이사를 하라고 종용하는 것은 사건의 진정한 해결이 아닌 단순히 덮어버리는 것에 그치는 데이비드의 선택은 용서를 통한 새 삶과는 거리가 멀다.


크리스테바에게 용서란 세상을 살아가고 인식하는 방식인 동시에 비난받아야 할 가해자가 미래에 다르게 행동하도록 하는 이론적 설명과 논리를 넘어선 타자에 대한 이해이다. 하지만 타자와의 관계로 용서를 한정해서는 안 되며, 용서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개인이 재탄생하고 새로운 지평을 향한 낙관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자신에 대한 용서이다.


『추락』의 세계관은 ‘용서’의 개념이 존재하는지 나는 의문을 품는다. 작품은 오히려 역사의 관점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지배한 백인들이 그들이 한 일을 충분히 회개하고, 피해자들 심정을 이해하여 용서의 요청이 있었는가라는 문제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는 ‘진정성’은 어떻게 획득해야 할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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