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성의 역사를 읽으면서.
나는 현재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를 잃고 있다.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 등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저서를 기반으로 성(Sexuality)에 대한 담론을 정리한다. 그리스인들은 동성애와 이성애를 기준으로 그 관계가 도덕적인가를 두고 고민하지 않는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남자의 관계의 행위로 그 기준을 삼기보다 개인에게 그 기준을 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능동적인 주체자로 지배하는 쪽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남성성’이라고 말하고 가치 있다고 말한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복종하지 않고 다스리는 것, 비노예적인 상태를 일컫는다. 이 남성성은 주체자가 애정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두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 개인이 쾌락을 시간과 상황에 맞게 해소하고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자연이 요구한 정도로 행위에 옮기는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의 대화에서 절제에 대한 찬양을 담은 에우티데무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있다. “자네는 아마도 선을 실천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며 그것을 방해하는 주인을 모시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한테는 무절제한 자들이 노예라는 게 사실이겠군… 자네 생각엔 최악의 노에 상태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최악의 주인을 섬기는 자의 노예 상태이겠지요.” 그가 말했다. “그러면 최악의 노예 상태는 무절제한 자들의 노예 상태이겠군.” “제가 바로 알아들은 거라면 소크라테스, 당신이 주장하는 바는 감각의 쾌락에 예속된 인간은 어떤 미덕과도 무관하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에우티데무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이 가장 어리석은 동물보다 무엇이 낫단 말인가?”타인에게 행사하는 권력 안에서 자신에게 행사하는 권력이다. 개인이 신분상 타인의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라면 노예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 기준을 정하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윗사람의 명령을 받는 사람은 그 자체로 노예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본래 연약한 처지이기 때문에 끓어오르는 욕망에 맞서는 것이 힘들다고 말한다.
어떤 사랑의 형식이 옮고 그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능동적이고 도덕적 주체로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성적 절제는 자유를 행사하는 개인의 행위이고 자기를 지배하는 형태를 띤다. 이것은 자기가 자신을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다루는 태도이고 이것이 곧 개인이 다른 타인에게 행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날 것이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