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책 리뷰] 선량한 차별주의자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차별하고 있다.

by 혜성

우리는 줄곧 사회는 평등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한다고 혹은 이미 그렇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어릴 적 TV 속 만화와 영화에서 정의로운 주인공은 어려운 시련을 견뎌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평등함과 정의로움이 실현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혹은 나는 절대 차별 따윈 안 한다고 믿고 있는가? 그렇담 이 책을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이성애자인 당신이, 비장애인인 당신이, 한국인인 당신이 사실은 얼마나 무지하게 차별을 저질러 오고 있는지 알려줄 것이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메시지를 꿰뚫는 몇 개의 섹션만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글을 읽고, 사람들이 책을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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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수에 속하는가, 소수에 속하는가?


작가는 전쟁 때문에 난민이 된 예멘 사람들을 두고 제주도에 수용하느냐로 시끄러웠던 과거 사건을 언급한다. 당시 이 문제를 놓고 남성과 여성의 찬반 조사가 있었다. 남성의 비율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여성은 반대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각자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대다수의 여성들의 이유는 그들을 '난민'이라는 위치가 아닌 생물학적 '남성'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제주도에 오면 한국 여성을 향한 성범죄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동 국가의 가부장적 이미지와 낮은 여성 인권 이미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결국 예멘 난민들은 제주도에 입국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다수에게 차별받는 소수자들은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를 이루고 서로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제주도 난민 사건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가부장적 체제가 강한 편에 속하는 한국에서 자신들은 소수자이고 사회적 약자라고 외치는 여성은 어째서 난민들과 연대에 실패한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한국의 여성들은 예멘 난민에 비해 한국 시민권(력)을 가진 다수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것이다. (아래 드라마 '송곳' 대사 인용)


이렇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카테고리로 묶여 있다. 나만 해도 이성애자에 비해 성소수자에 속하지만, 외국인에 비하면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다수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종교에 따라 계급과 성별, 성지향성에 따라 누구와 대조해서 보느냐에 따라 나의 위치는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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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_183300_4651.jpg 웹툰 원작 '송곳' 꼭 보여야 합니다!!




공공 공간에 입장할 자격.


‘아고라(Agora)’는 그리스 최초의 공공 공간이라고 기록된다. 민주주의가 실현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아고라에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성뿐이었다. 여성, 노예, 아동은 입장이 불가하였다. “아고라는 ‘불평등한 자’의 존재를 조건으로 한 평등의 장소였다.” 현대 사람들은 이에 모순이 있고 불평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도부터 퀴어퍼레이드를 진행해 왔다.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퍼레이드를 방해하기 위해서 각종 종교단체와 시민들의 시위는 거셌고, 심지어 폭력이 일어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자신들 교리 전반을 관통하는 특정 종교단체는 앞장서서 ‘혐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의아하기까지 하다. 시민들도 혀를 차며 그냥 조용히 있지 뭐라고 밖으로 나와서 시끄럽게 구나라는 생각을 쉽게 내비치기도 한다. 특정 그룹을 싫어하는 것도 자신들의 ‘권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1988년 올림픽을 위해 도시환경정화사업이란 이름으로 1986년과 1987년에 시행된 길거리의 부랑인 없애기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형제복지원과 몇몇 수용시설에 일방적인 격리는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성소수자들은 평등과 정의를 전제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아고라에 입장할 수 없는 '불평등한 자'가 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 발언을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대중 앞에서 동성애에 대한 반감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문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 또한 권리라고 대신 방어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맞는 걸까? 혐오의 표현도 권리인가?


작가는 누구나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것엔 권력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직장상사를 부하가 싫다고 말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다수자와 소수자는 이미 권력관계나 위치상으로 기울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다수자가 소수자에게 향하는 싫다는 표현은 소수자가 다수자에게 하는 그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자면, 비장애인이 ‘장애인은 싫다’라는 말과 장애인이 ‘비장애인은 싫다’라는 말, 동성애자가 '이성애는 싫다'와 이성애자의 '동성애는 싫다'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이민자가 '한국인은 싫다'와 한국인의 '이민자는 싫다'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대중 앞에서 차별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지위의 유동성을 가로막는 조건들, 예컨대 성별, 인종, 민족, 장애,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등과 같은 인적 특징들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요소가 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른 능력을 남들보다 더 많이 키우라는 요구를 받는다. 여자라서, 이주민이라서, 장애인이라서, 성소수자라서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개인의 불굴의 노력으로 그 불리함을 ‘극복’한 성공신화를 칭송한다.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아프거나 실패하거나 어떤 이유로건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 원치 않게 소수자의 위치에 놓였을 대 그 사실을 부정하며 고통을 감내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pp.1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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