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자연으로 향하다.

늦게 온 성장통.

by 혜성
20190119-IMG_1980.jpg 태백산 정상에서.


20대 후반이 돼서야 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했다. 주변에서 배우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커서인지 그것 말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영부영 고등학생이 되고 연기 입시를 시작했고, 학원 핑계로 3교시만 하고 학교를 빠지는 게 즐거운 철없는 시기를 보냈다. 게다가 운까지 좋아서 연극영화과에 붙었다.


대학교 생활에 문제는 많았지만 졸업은 마쳤으며, 사회에 나와서 연기는 여전히 나중에 직업으로 해야 할 숙제로 남겨두고 아르바이트하면서 전전긍긍하며 서울생활을 했다. 그렇게 보낸 20대의 끝자락에서 큰 결심을 하게 됐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미 내린 결론을 실행에 옮기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후회 없이 미련 없이 내 소중한 인생을 이렇게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다짐을 했다고 해서 어떤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막막하기만 했다. 나는 일단 책을 읽었다. 철학, 사회, 문학 등 마음 가는 데로 관심 가는 데로 깊지 않고 얇게 지식을 쌓아간다는 생각으로 훑었다. 그리고 나만의 문장을 하나 만들었다.


좋은 선택은 맑은 정신이 바탕이 되며, 맑은 정신은 곧 건강한 신체가 기초된다.




나는 내 몸이 얼마나 엉망인지 그때 처음 느꼈다. 내 신체에 관심을 먼저 가져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험상 헬스, 수영, 조깅은 지루해하는 편이라서 고민한 하던 차에 당시 산을 좋아하던 애인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그렇게 난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시작한 첫 번째는 바로 등산이었다.



20190112-IMG_1870.jpg 지리산 법주사.

매주 주말이 되면 나는 산을 오르기로 했다. 애인은 국립공원을 모두 완등했고, 지리산을 스무 번은 다녀온 애호가였기 때문에 등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처음엔 집에 있는 운동화로 시작했고, 나중엔 좋은 등산화와 스틱을 구매하면서 조금씩 등산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장비를 제법 갖추기도 했다.


가장 처음으로 등산한 곳은 지리산이었다. 대피소에 예약해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쏟아지는 별과 석양을 감상했다. 그러다 이 장면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카메라를 구매했다.


20190101-DSC_0315.jpg 1월 1일 설악산에서 새해 아침.


미래에 대한 고민과 현실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오로지 정산에 오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느리지만 안전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인생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0181118-IMG_0857.jpg 한라산의 까마귀.


정상에 누가 얼마나 빠르게 올라가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얼마나 비싸고 좋은 장비를 착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등산의 목표는 등산의 시작점과 산의 정상 사이인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충분히 즐기고 있냐는 것이었다. 난 남들의 속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주변을 돌아보며 즐기는 것을 목표로 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자연과 교감하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마주하였다.


20150118-KOCK6136.jpg 설악산에서.


KakaoTalk_20220323_202109547.jpg 오대산에서.

나는 그날 하루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남들보다 혹시나 뒤처질까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의 범위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최선을 다했다.


20190101-DSC_0348.jpg 설악산.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그것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한다. 구름을 바람을 따라, 물은 바다를 향해 아래로, 식물은 하늘을 향해서 말이다. 또한, 내가 자연의 일부분이라면 내 안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바람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안에 '내 욕망'인 척하는 수많은 타인의 욕망과 마주하게 됐고 그것을 모두 걷어내고서야, 처음으로 나의 순수한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자연을 통해 나 자신과 절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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