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살아남기.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치고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에 도래했다. 이전의 농업으로 엮인 마을 공동체의 힘을 약화되고 가족단위로 쪼개지거나 개인단위로 쪼개져 개인주의로 향했다. 수익구조가 바뀐 탓이 컸다. 공동체끼리 노동으로 일궈내고 수확한 생산물은 가족에서 마을 공동체끼리 공유하며 생활했지만, 산업시대에선 개인이 공장으로 가 일한 시간만큼 돈을 벌어오는 구조였다. 단체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은 이제 더 이상 남들과 달라도 이웃들의 불신을 살 필요도 없고 경제적 손해를 볼 이유도 없다. 게다가 대량 생산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의거해,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여러 기회들을 맞이하게 된다.
홍대 길거리에서 타투에 대한 인터뷰를 한 영상들을 찾아봤다.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에게 타투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개인적으로 타투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이었지만, 내 남자 친구가, 내 여자 친구가, 내 친구가, 내 사위될 사람이나 며느리 될 사람은 타투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었다. 본인들은 타투에 대해서 열린 마음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안 좋게 볼 수도 있으니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크기는 너무 크지 않게, 적당한 개수를 가지고 있으면 나쁘지는 않을 거지만, 자신들은 하고 싶지 않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한국은 아직은 산업사회와 소비사회에 접어든 지 오래지만 아직도 개인의 취향이나 개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탕수육은 부먹인가 찍먹 인가로 인해서 누구의 취향이 옳은가를 두고 이야기해야 하며 어느 한 그룹이 다른 한 그룹에게 흡수를 당할 때까지 논쟁해야 한다. 둘 다 옳은 것일 순 없을까? 또 친구가 내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선언했을 때의 반응은 ‘개취(개인의 취향) 존중할게!’하며 쿨하게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는 ‘이해와 존중’보단 ‘무시와 무관심’이 깔려 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터럭 하나라도 감히 훼손해선 안된다.’라는 옛 말은 현재까지도 우리의 정서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내 몸의 권리는 진정 내가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가깝게는 부모 혹은 다른 사람(주변인)들도 그 권리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린 옷차림, 머리스타일과 행동을 남들이 보기 때문에 잘 차려입어야 한다. 부모님의 눈치를 보면서 염색을 해야 하고 옷을 사야 한다. 남자 친구, 여자 친구의 눈치를 보면서 행동해야 하고 뛰지 않고 적당히 꾸며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눈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내려놓게 되고 어떤 연예인이 입고 나온 옷을 다 같이 사서 입고 다닌다. 쿨한 남자는 시대의 유행을 따라 해야 하고 머리스타일도 맞춰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색을 과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조금 과한대?’라며 경계하고 손가락질한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얼마나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민주주의 사회에선 이상하게 다수가 소수를 억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대다수가 하는 패션과 일을 따라 하는 것은 옳은 일이 된다. 결혼이라는 것은 한 공동체가 타인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공동체의 최고의 권력자인 부모님은 심판관이 된다. 자식의 결혼에 대해 거부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부모가 거부하는 결혼을 하기라도 하면 가족과 결별할 각오까지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개인의 권리를 가지고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망나니처럼 민폐를 끼치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은 도시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피어싱을 하고 타투를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옷과 머리 스타일을 한다고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 개개인의 삶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나는 단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