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세계란?
역자 후기를 보면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Eva)는 영어로 이브를 의미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브는 최초의 여성이자 신께서 명령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나고 원죄를 인간에게 짊어지게 한 사람이다.
“너의 <허용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넌 알았어. 그리고 두 번째 절반을 감추지 못할 거야! 누구도 안 돼, 한 번 생각하기를 시작하고 나면 말이야.” (85)
에덴동산은 완벽한 세상의 상징이자 우리의 죽음 뒤에 도달할 환상의 파라다이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세계에는 조건이 있다. 신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것.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는 선한 자이고 의문을 품고 저항하는 자는 바로 악으로 손가락질받는다. 그가 신으로서 말한 완벽의 세계가 이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가 인간에게도 완벽한 세계가 되어야만 하는가? 이브는 신의 세계의 모순을 발견하고 그것에 저항했다면 그녀가 어떻게 보일까? 그녀는 데미안이 말하는 압락서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과 악이 각각 반반씩 있는 악마이자 천사인 압락서스. 인간의 사는 세상은 오롯한 선이 존재할 수도 없고 절대 악만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한쪽을 믿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세계의 절반만 알고 있는 셈이다.
에바의 아들 데미안은 영어로 악마를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절대 악으로 상징되는 크로머와는 대조된다. 데미안은 선과 악을 모두 받아들인 인물이다. 어떤 행동이 악하고 선한지 아버지(신의 말씀인 성경을 찾아 확인할 필요도 없다. 내가 선한 인간인지 악한 인간인지 신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그는 주체적인 개인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이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어머니의 세계는 포용이 있고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모두가 동등한 세상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운명과 심성은 하나의 개념에 붙여진 두 개의 이름이다.”(113)라고 말한다. 이것은 싱클레어 세계에서 절대악으로 불리는 크로머를 떠올리게 한다. 크로머는 단지 가난한 부모를 만나 생존을 위해 자신을 방어하려고 악한 심성을 갖도록 키워진 것이다. 싱클레어는 선천적으로 착하게 태어나서 착한 게 아니고, 크로머와 같은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그도 크로머와 같이 악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선과 악은 항상 우리 안에 존재하며 현재 싱클레어가 선한 이유는 그의 상황(운명)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니 상대를 탓하고 혐오하지 말라고 말한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200)
그녀의 세계는 올바른 길을 인도하는 가이드이고 대조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는 명령과 복종의 이분법적 세계를 뜻한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선 그가 좋아하는 일은 해야 한다. 그것은 악을 없애는 폭력을 동반한 일이다. 에바의 대사는 그것보다 주체적인 한 인간이 되어 타인을 끌 수 있는 인간이 되라고 싱클레어에게 조언한다. 알을 깨고 나와서 하늘을 자유롭게 누비는 매와 같이 선과 악을 모두 받아들이고 누구를 ‘위한’ 행동이 아닌 자유로움과 주체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세계에선 아버지가 무엇이 악하고 선한지 그 나침반 역할을 한다. 그렇담 어머니의 세계에선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과 아닌 행동을 어떻게 구별할까?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아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116) 싱클레어가 방황하고 알코올에 의존하고 있을 때, 오랜만에 만난 데미안의 대사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바로 양심이다. 싱클레어는 술집으로 향하면서 술을 마시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데미안을 만나기 전까지 그에겐 ‘주체적인 내면의 의지’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술에 항상 패배했다.
성인이 된 싱클레어는 전쟁에 참여하다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온다.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데미안을 마주하게 된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어쩌면 다시 한번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네 자신 안으로 귀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듣겠니? 그리고 또 뭔가 있어! 에바 부인이 말했어. 네가 언젠가 잘 지내지 못하면 날더러 네게 당신의 키스를 해달라고. 나에게 함께 해준 키스를… 눈을 감아, 싱클레어!” (중략)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222)
이후로 데미안은 사라지고 싱클레어는 자신이 그와 닮아 있었다고 말한다. 난 선과 악의 치열한 전쟁을 겪고 부상을 당한 싱클레어가 각성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 프란츠 크로머와 더 넓게는 국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에게 주체성은 없었고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 스스로 판단할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알코올 의존증에 빠지기고 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세계의 충실한 노예였지만 자신이 얻은 것이라곤 부상당해 피를 흘리는 몸이다. 이제 그는 완전히 알을 깨고 나온 매와 같이 세상을 질주하며 더 먼 곳을 향해 활강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첫 번째 목표지점은 자신의 경험을 써서 세상의 많은 싱클레어들에게 『데미안』을 소개해주려 한지도 모르겠다.